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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인 Sep 09. 2024

잠깐 회의실로 좀 와볼래요?

Part1.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 ep.02

첫 회사에 입사한 지 6개월 정도 지났다. 업무가 능숙해져 오전에 처리해야 할 분량을 끝내 놓으면 점심시간 전까지 쉬는 시간도 생겼다. 남는 시간에 인터넷 쇼핑을 하거나(일하는 척), 사내 메신저로 동기들과 시시콜콜 일상 이야기를 하거나(일하는 척), 가끔은 모니터를 보며 멍도 때렸다(일하는 척). 자연스럽게 생각할 시간이 생겼고, 이렇게 쉬면서 일을 해도 되는 건가 싶었다. 내가 어릴 적 상상하던 커리어 우먼과는 달랐다.


상사들과의 관계도 나쁘지 않았다. 여초 집단 특유의 낮지 않은 텐션이 있어 처음에 적응하기는 어려웠지만, 일단 겉으로는 웃고 있어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자신의 무리가 아닌 자들에게 보이지 않는 신경전과 긴장감이 있었지만 적응하다 보니 우리 동기들끼리도 다른 무리들처럼 끈끈함이란 게 생겼다.


오래 연차를 쌓은 위 상사들을 보고 있으면 그들만의 안정감이 있는 것 같았다. 신입이 들어오면 업무 교육을 체계적으로 진행했고, 바쁘지 않을 땐 연차도 자유롭게 쓰고 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육아휴직 쓰는 회사가 많이 없었는데 여자들이 많은 집단이라 그런지 복지가 잘 되어 있어 아이를 낳고 키우다가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는 직원들도 몇몇 보았다. 충분히 안정감을 주는 회사인 반면 일적인 면에서는 상사와 내가 하는 일과는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승진하면 뭔가 고차원적인 일을 할 줄 알았는데 상사가 하는 일이 나와 비슷한 수준이라면, 그리고 몇 년 뒤에도 지금의 일과 똑같이 하며 회사 생활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니 고인물 같이 정체되고 싶지 않다는 배부른 생각이 들기 시작하였다.


시작은 남자친구와 헤어지지 않기 위해 데이트 비용을 충당하기 위함과 경력을 우선 쌓는 거였지만 막상 직장 생활을 해보니 나라는 사람은 일 욕심이 많고 무엇보다 성취감이 중요하였다. 이 성취감을 어떻게든 계약직 기간 1년 안에 해소해야만 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자격증을 취득하는 것이었다.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챙겨 와 10분이면 밥을 먹어 50여 분 정도 시간이 남아돌았다. 가장 버티기 힘든 시간이 이렇게 남는 점심시간이었다. 평소 같으면 동기들과 산책하거나 수다 떨고 낮잠을 자며 보냈는데 언제부터인지 이런 시간들도 아깝단 생각이 들었다. 권태로워진 회사 생활에 지겨움이 가중되는 것 같았다.


당시 남자친구가 금융권 취업을 준비해서 자연스레 금융 자격증이 눈에 들어왔다. 회계 자격증을 가지고 있으니 이번엔 결이 다른 자격증을 준비하고 싶었다. 신용평가사에서 일을 하고 있어 직무로 연관시킬 수 있는 신용분석사 자격증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이직할 때 이력서 한 줄 추가가 가산점으로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퇴근하고 공부해도 되지만 무료하다고 느끼는 회사에서 짬짬이 자격증 공부를 하면 직장 생활에 활력이 돋을 것 같았다. 지겨워하던 점심시간을 좀 더 생산적으로 쓸 수 있는 할 일이 생긴 것이다. 점심을 후딱 먹고 자리로 돌아와 이어폰을 꽂고 인강을 들었다. 같은 팀, 다른 팀 직원들이 등 뒤로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특유의 두꺼운 등 철판을 가진 나는 상관하지 않았다. 남들 시선을 잘 신경 쓰지 않은 탓에(오히려 즐길 수 있는 베짱이 있는 타입) 아랑곳하지 않고 이어폰 속 강사님의 말에 집중하였다. 자리에서 넉넉 잡고 30분 정도 공부할 수 있었는데 어떤 시간보다도 알차게 보내는 기분이었다. 짧은 시간이다 보니 집중도 더 잘 되었다. 동기들도 그런 나를 처음엔 이상하게 여겼지만 내 의사를 나중에 전해 듣고 나선 진심으로 응원해 주었다.(나중에 그들도 영향을 받는 것 같았다)  


“다인씨, 회의실로 좀 와볼래요?”     


회사에서 강의를 들은 지 2주 정도 흘렀을까. 따로 불러낸 적 없는 팀장님이 오후 업무를 시작하기 전 나를 호출하였다.


“자기 지금 하고 있는 거 무슨 공부.. 하는 거야? 혹시 이직 준비하는 거야?”


나는 올 것이 왔구나라고 생각했다. 이런 날이 올 것 같은 예감에 준비해 둔 말을 내뱉었다.     


“팀장님..! 그런 건 아니고요. 저는 이 회사 입사할 때 너무 모르고 들어온 것 같고, 나중에 부서를 옮겨가면(한 단계 위 부서로 옮겨가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일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관련 자격증 공부를 하고 있던 거였어요. 그리고 저는 이렇게 자격증 공부하는 거 좋아하거든요(말도 안 돼).”     


“아 그럼 준비하는 자격증이 뭔데?”


“신용분석사요..!”     


“아 ~~ 그렇구나, 그렇겠네. 충분히 업무와 관련 있는 자격증이지. 나는 다인씨 일도 잘하고 있고 매사 열정적인 것 같아 보기 좋아서 웬만해서는 터치하고 싶지 않았는데 다른 부서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하는 것 같아서, 한번 물어봤어~ 꼭 땄으면 좋겠다. 이제 가봐도 돼.”


팀장님께서 이해해 주는 말씀을 해주시는 것 같아 죄송스러움이 밀려왔다. 당장은 그만두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추후에 내가 퇴사를 하더라도 그저 후배가 미래를 준비했던 거라고 생각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이후 1년 계약이 끝나는 날, 나는 자격증을 취득한 상태로 근로 계약 연장을 하지 않겠단 퇴사 서명을 하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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