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엔 즐거웠던 글쓰기가 어느 순간부터 어려워졌다. 내가 유명인이 아님에도 다 꺼내보이기 어려웠다. 별생각 없이 블로그에 일상 글을 올렸을 땐, 누군가가 읽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써 내려갔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내 글에 대해 아는 체는 하지 않아 주었으면 하는 반대의 감정도 있었다. 나는 이런 양가의 감정을 선호하지 않는다. 가식적이고 위선 떠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글쓰기 모임도 온라인으로만 참여해 왔다.
누군가 내 블로그 글을 잘 읽고 있다고 할 때면 흠칫흠칫 놀랐다. 혹시나 보면 안 되는 글이 있었나 하고 빠르게 머리 굴리기 시작한다. 애초에 글을 쓸 때 이미 생각하고 썼음에도, 과거의 나를 믿지 못해 결국 화장실로 달려간다. 변기 뚜껑을 내리고 앉아 글의 공개 설정을 확인한다. 이런 생각과 행위를 반복하다 보면, 글을 쓰기도 전에 이미 지쳐있다. 이젠 누굴 신경 쓰고 생각하기도 귀찮다. 그래서 요즘 더 비슷한 글만 쓰는 것 같다. 더 깊이 있게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책이 출간한 뒤, 어느 날 대학 동기가 책의 한 페이지를 찍어 보냈다.
“이거 ㅇㅇ 그 사람 이야기지?”
나는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책을 사서 읽어준 건 고마웠지만, 그 당시엔 나는 그 친구가 무례한 것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친구로서(친한 친구는 아니었지만 내 연애사를 대략 알고 있다) 당연한 궁금증이었는데도 기분이 유쾌하지 않았다. 책을 구매해서 읽어준 최소한의 고마움을 담아 답장을 보냈다.
“그런 거 생각하지 말고 읽어줄래ㅋㅋㅋ”
내 연애사가 부끄럽진 않지만 가까운 이가 알면 마치 어릴 적 일기장을 들쳐본 것처럼 창피했다. 모르는 이가 보는 건 상관없는데, 날 아는 사람이 보면 왠지 모르게 홀딱 벗은 기분이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그 친구와 서서히 멀어지는 길을 택했다.
이런 것도 여유 있게 말하지 못하는데 앞으로 어떻게 글을 쓸 수 있을까, 글쓰기로 맞이한 첫 장애물이었다.
누구나 글을 쓸 수 있고, 마음만 먹으면 책도 낼 수 있는 시대이다. AI를 활용하면 특정 작가의 문체로 글도 만들 수도 있다. 최근 임경선 작가님의 ‘누가 작가인가’라는 강연을 들었다. 작가님은 실상 누구도 하기 어려운 말을 쓸 수 있는 게 작가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 어려운 이야기를 실로 깊이 있게 고민하고, 또 고민해서 쓰면 자신만의 고유의 문체를 만들 수 있다고 하셨다. 작가가 될 수밖에 없는 과정인 것이다.
교보문고 신간 코너에 내 책이 있는 걸 처음 본 순간, 난 기쁨보다 두려움이 몰려왔다. 과거 남자친구들로부터 연락 올까 그게 무서웠다. 실제로 출간 후 몇 개월간 잠 못 이룰 때도 있었다. 하지만 걱정이 무색하게도 단 한 명도 연락 오지 않았다.
처음 글을 쓸 땐 에피소드로 활용된 전 남자친구들로부터 연락 와도 상관없다는 마인드로 글을 썼었다.
며느리의 연애사를 시댁에서 알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마인드로 글을 썼었다.
남편이 읽어도 과거 없는 사람은 없으니 나는 당당할 수 있다는 마인드로 글을 썼었다(이미 서로의 연애사를 잘 알고 있다).
연애 경험이 많아 자칫 가벼운 이미지로 사람들이 인식해도 상관없다는 마인드로 글을 썼었다.
나의 이런 패기는 지금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 한때 솔직함이 강점이던 나의 당당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이 마음의 벽을 뚫고 싶다. 나는 어디에서 가로막혀 정체되어 있는 걸까. 내 마음의 소리가 궁금했다.
잃을 게 생겨서니?
잃을 게 있을 만큼 가진 게 없잖아.
나이를 먹어서니?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알려지면 스스로 상처받기 싫어서니?
그건 좀 맞는 것 같아.
내 글로 누군가에게 상처가 된다면 그건 못 견디는 것 같아.
내가 상처받는 느낌이기도 해.
아 아니다.
누군가 상처받아서 내게 해코지를 하는 거, 실은 그게 가장 무서워.
결국 타인이 아닌 내가 상처받을까 봐의 두려움이었다. 블로그에서 책에 대한 혹평을 읽을 때마다 가슴 아팠다. 서점 어플에 있는 책의 관한 악플도 당연히 읽기 힘들었다. 사람마다 다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면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시간이 흘러도 무뎌지지 않았다. 글을 쓰면 쓸수록 내 이야기를 쓰기 어려워진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헤쳐나가면 좋을까. 대담해지는 날이 올까. 글쓰기는 마음의 벽을 허무는, 고백의 행위인 것 같다. 소싯적 고백 용기를 다시 끌어와야 할까. 진심을 담은 글 고백이라면 두려움에 맞설 수 있지 않을까. 이 또한 과정이라 생각하고 흘러가게 두면 잘 흘러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