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을 비우며
지난 주말, 책상에 앉았는데 뭐부터 할지 몰라 한참을 멍 때렸다.
수요일 밤부터 목이 조금씩 아프더니, 목요일 새벽엔 따끔거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잠결에 목이 건조해서 침을 삼킬 때마다 불쾌한 통증이 계속됐다. 단순 목감기라 생각하고 그냥 약 먹고 조금 쉬면 낫겠지 했는데 아니었다. 금요일에는 열이 37.8도까지 올랐고 더 오르면 안 되겠다 싶어 부랴부랴 이비인후과로 향했다.
남편은 나보다 하루 먼저 증세를 보였다. 내 면역이 더 낫나 싶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내가 더 심해졌다. 그이는 ‘내 몸은 내가 이겨낸다’는 이상한 철학이 있어 약도 최소한으로 먹고 병원도 가지 않았는데 금세 호전됐다. 나도 그러길 바랐지만 내게는 통하지 않았다.
의사 선생님은 내 코와 목을 깊게 들여다보더니 빨갛게 부었다고 하셨다. 열도 있고 요즘 독감이 기승이라 검사를 권유했다. 감기약과 독감 약 처방이 달라 감기약을 우선 먹어보고 검사해도 된다는 선택지도 주셨다. 나는 이왕 시간 내어 온 김에 독감 검사를 받았다. 장대 같은 면봉이 코를 넘어 목까지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15분 뒤쯤 결과를 들었는데, 다행히 독감은 아니었다.
온 김에 수액도 맞고 싶었다. 빨리 낫고 싶고 더는 누워 있고 싶지 않았다. 아파서 누워있으면 해야 할 일이 떠올라 더 스트레스를 받았다. 상담 일정도 컨디션 봐가며 뒤로 미루고 있는 와중이었다. 다음날 오전에 상담이 잡혀 있고 이후엔 대학원 수업도 들어야 했기에 아픈 채로 쉬는 게 편치 않았다. 선생님은 수액이 감기를 바로 낫게 하진 않지만 빨리 회복할 수 있는 몸으로 만들어준다고 했다. 영양 수액에 해열제를 넣어 50분 정도 맞았다. 직수라는 표현이 어울릴지 모르겠지만 혈관에 바로 들어가니 열도 금방 내려갔다. 병원 올 때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버스를 탔는데, 돌아갈 땐 걸어서 갈 수 있었다. 열이 내려가면서 몸이 후끈해졌고 무엇보다 내내 누워있어서 좀 걷고 싶었다. 한 시간 만에 컨디션이 괜찮아진 걸 보니, 이래서 수액, 수액 하는구나 싶었다. 실은 생애 첫 수액이었다.
수액 덕인지 정말로 회복되어 갔다. 다만 일요일 새벽에는 코 막힘 때문에 뒤척이다 3시에 잠에서 깼다. 더 잘까 싶었지만 뒤척이는 것도 지겨워 그냥 일어났다. 잠시 책상에 앉아 멍을 때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책장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홀린 듯 책장에서 책을 하나씩 골라 바닥에 두기 시작했다. 벽 한쪽 책장에 책들이 꽉 채우고 있어 볼 때마다 답답했다. 20대 때부터 사 모았고, 결혼할 때도 친정에 있는 책을 모조리 들고 왔다. 그러다 장식용이 되어 버린 책들을 언젠가는 정리해야겠다 싶었는데, 그게 하필 그때였다.
정리 방법은 알라딘 ‘원클릭 팔기’를 이용하기로 했다. 책을 한 권씩 펼쳐보며 낙서가 있는지 확인했다. 연필로 밑줄 그은 부분은 지우개로 살살 살살 지웠다. 너무 많이 봤거나, 낙서가 많은 책은 그만큼 열심히 읽은 책이라는 생각에 남겨두었다. 그중에 절반도 못 읽은 책들도 많았다. 책에 꽂혀있는 책갈피도 그 모양새가 제각각이었는데, 책갈피를 뺄 때마다 그 책을 읽었던 순간들이 어렴풋이 지나갔다. 광고와 마케팅에 열정 있던 학부 시절, 회사 다니며 힘들 때마다 밑줄 긋고 필사하며 읽었던 이직/퇴사/대인관계 책들, 여러 소설 시리즈들... 책에서 답을 찾고 위로를 받으려고 했던 때를 떠올리며 추리다 보니 어느새 100권이 넘었다.
혹시 팔면 안 되는 책이 있나 싶어 마지막으로 훑어봤다. 미련이 남는 책들도 있었지만 다시 펼치지 않으리란 것도 알기에 바닥에 내려뒀다. 책을 샀던 그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나’는 많이 다르게 느껴졌다. 그때의 열정과, 심정으로 돌아갈 수 없을뿐더러 혹여나 돌아갈 수 있다 하더라도 미숙했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알라딘에 쿠팡 로켓 프레시 박스와 같이 책을 담을 수 있는 박스를 신청할 수 있었다. 1박스에 20권씩 들어간다고 해서 5박스를 신청했다. 책은 일단 책장 앞에 쌓아두었고, 박스가 도착하면 잘 포장해 보내기로 했다.
감기 때문에 아무것도 못 하고 누워 있던 며칠이 불편했는데, 오래 벼르던 일을 마무리하고 나니 마음이 차분해지고 평온해졌다. 누워 있던 시간이 헛되지 않은 것 같았다. 마치 이걸 하려고 아팠던 것처럼, 하나의 큰일을 끝내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기분이다. 이제 그만 멍에서 깨어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