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만 20살 미국으로
인생은 예상치 못한 서프라이즈의 연속이라고, 미국이라고는 꿈도 꿔 본 적 없던 내게 어느 날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우리 가족 미국 영주권이 승인났고, 몇 개월 안으로 영주권을 받고 미국으로 갈지, 아니면 영주권을 포기할지를 결정해야 한다."
대학도 잘 다니고 있었고, 이제 여자친구도 사귀고 싶었던(이때까지 한 번도 못 사귀었음) 내게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아버님은 기도하시는 분이었고, 자녀들을 위해 주어진 이 기회가 미국으로 가는 것이 올바른 결정인 것 같다고 하셨다. 미국에 사시는 고모께서 혹시 모르니 영주권 신청을 해 주신 지 10년 이상이 지나서 나온 것이었고, 심지어 아버지조차도 까맣게 잊고 계셨다가 내가 대학교 1학년으로 신나게 학창 생활을 즐기고 있던 중 이런 소식을 듣게 된 것이었다.
친구들과 눈물의 이별을 하고, 우여곡절 끝에 만 21살을 두 달 앞둔 2001년 5월 22일, 내 인생 처음으로 미국에 도착하게 되었다. 4인 가족 중 장남이었던 나는, 미국 오기 전 종로 파고다와 YBM에서 익힌 영어회화 실력으로 다행히 세관을 무사히 통과했고, "Welcome to America"라는 축하 인사와 함께 미국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 첫 발을 내딛었다.
부모님은 2개월 동안 고모 댁에 함께 계시면서 나와 여동생의 정착을 도와주시고, 만 21살 생일파티까지 함께한 후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셨다. 이제 미국에서도 21살 성인이 된 나는 새로운 문화와 영어와의 즐거운 전쟁을 시작했다. 신시내티에 위치한 Xavier University ESL 프로그램이 괜찮다고 해서 시험을 보고 반 배정을 받았는데, 총 4개의 레벨 중 처음에는 3이었다가 다시 조정 후 Level 4로 들어가는 영광을 누렸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ESL 내 레벨일 뿐, 실제 영어 실력은 아직 갈 길이 멀었다. 고모께서 일하시는 Beauty Supply Store(주로 흑인이 주 고객이며 가발, 네일 제품 등을 판매)에서 토요일마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다양한 액센트의 영어를 접했다. 그 가게 매니저급으로 일하던 Kimberly라는 미국 분이 “너 한국 이름 발음이 너무 어렵다. ‘Sean’ 어때?”라며 나의 영어 이름을 지어 주었다.
ESL은 말 그대로 전 세계 다양한 나라에서 온 학생들의 집합체였다. 일본 P&G 회사에서 연수를 온 3명의 회사원, 대만에서 온 Chin, 중국 요리를 종종 해주던 준빠오, 사우디에서 온 축구 잘하던 친구, 멕시코, 독일 등 각자 독특한 액센트로 아무 영어나 내뱉어도 괜찮은, 아주 안전하고 즐거운 공간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축구 경기를 하는 날이면, 10개국 이상의 다른 국적을 가진 20명 남짓 되는 사람들이 모여 함께 뛰었다. 누구보다 이기기에 진심이고 영어를 배우기보다는 축구로 체력을 기르는 데 집중했던, 참 즐거운 시간들이었다.
ESL을 공부하던 대학에서는 레벨 4를 마친 경우 2학기 때 대학교 수업을 들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고 내가 선택한 과목은 다름 아닌 Public Speaking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