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작품의 영원한 생명력
주관적 이상성을 지향하는 순수예술(파인아트)과 대중성을 지향하는 실용 예술(혹은 상업 예술) 사이에는 분명 두드러진 차이가 존재한다. 그러나 출발점이 어느 곳이든 진정한 걸작은 양측의 입맛을 동시에 만족시킨다. 따지고 보면 이와 같은 분류 방식이 적립되고 통용된 것은 불과 100년도 되지 않은 일이다. 베토벤과 빅토르 위고 같은 예술가들만 놓고 보아도 그들의 대표작은 이미 시대적 민중 심리를 소상히 담고 있다. 반대로 오늘날까지 각광받는 이브 생로랑과 엔니오 모리코네의 작품들이 순수 창작 영역을 완전히 벗어났다고 보는 것 역시 무리가 있다. 따라서 모든 예술은 어느 방향성을 택하든 그 접근에 있어 예술사적 전통에 기인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위와 같은 분류는 결국 파생된 강줄기를 논하기에 유용할 뿐, 본질적 수원(水源)에 대한 고민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예술의 종류가 아니라, 예술의 생명력이다.
그렇다면 걸작들의 무한한 생명력 속에는 어떤 비밀이 숨어있을까?
재능 있는 창작자가 파격적인 주제를 선정해 사회적으로 박해받고 탄압받은 사례는 셀 수 없이 많다. 아이러니한 점은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고전의 칭호를 획득한 작품 중에도 이와 같이 대중적으로 명백히 실패한 창작물들이 제법 많다는 사실이다. 스트라빈스키는 ‘봄의 제전’을 작곡해 전 유럽을 토론장으로 만들었고, 에밀 졸라는 ‘목로주점’을 집필한 뒤 프랑스의 보수와 진보 진영 모두에게 비난을 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살아생전 고흐와 고갱이 화가로서 대접받지 못했다는 이야기는 실로 유명하다.
나는 이들의 작품이 훗날 대중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작품이 불러일으키는 감성적 요인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특정 기술에만 특화된 작품의 수명은 대게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작품들이 재평가될 수 있었던 것은 깨어 있는 지성들의 무던한 노력 덕분이다. 제아무리 가치 있는 창작물을 내놓아도 시대와 인물이 받쳐주지 못하면 그것은 헛수고가 돼버린다. 창작물에 대한 온전한 평가는 작품 속에 잠재된 생명력인 예술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를 속속들이 파악해 줄 지적 중계자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의 혜안은 언제나 ‘완성도’를 향해 있다. 따라서 걸작의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또는 핵심적인) 요소는 작품의 완성도인 것이다.
그렇다면 예술에서의 완성도란 무엇일까?
생텍쥐페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더 이상 추가할 것이 없을 때가 아니라, 더 이상 뺄 것이 없을 때 완벽함이 성취된다.”
“Semble que la perfection soit atteinte non quand il n'y a plus rien à ajouter, mais quand il n'y a plus rien à retrancher.”
창작물은 언제나 고유의 창작 동기와 창작 배경을 수반한다. 창작 동기에는 작품 속 창작자의 의도나 메시지가, 창작 배경에는 작품이 창작된 시기의 시대상이나 창작자의 현실적 상황 등이 함축되어 있다. 이 말은 즉 창작물의 콘셉트는 창작 이전에 착상 과장에서 상충되는 창작물의 잉태 조건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창작물의 주제와 창작물의 완성도는 명백히 별개의 선상에 있다. — 혹자는 착상 또한 창작의 한 과정이라 말한다. 그러나 이는 명백한 궤변이다. 우리가 유추하는 창작물의 창작 과정은 완성된 창작물과 그에 따른 사례들에 근거한다. 완성되지 않은 창작물을 대상 삼아 창작 과정을 유추하는 것은 결단코 불가하다. 그럼에도 착상을 창작의 한 범주로 포함시킨다면, 이는 현실화되지 않은 머릿속 어떠한 정념을 예술 작품으로 간주하는 격이며, 예술적 착상을 즐기는 일반인조차 창작자로 간주하는 꼴이다. —
창작물의 주제와 창작물의 완성도가 별개 선상이라면 생텍쥐페리의 주장은 더욱 힘을 얻는다. 완벽함이란 완성도의 정점을 의미한다. 더 이상 추가할 것이 아니라, 뺄 것이 없을 때 완벽함이 성취된다는 생텍쥐페리의 주장은 결국 주어진 창작 동기와 창작 배경이라는 재료를 토대로 극한의 효율과 실리를 살려 탄생한 창작물에 완성도가 성취된다는 뜻이다.
완성도 높은 작품들은 잘 만든 시계와 같다. 시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려면 모든 부품이 알맞게 갖춰져야 한다. 부품의 재질과 상태가 좋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 부품들이 자기 위치에 적재적소로 비치되어야 한다. 필요하지 않거나 생략 가능한 부품은 단 한 개도 존재하지 않는다. 완성도 높은 작품에서 역시 이처럼 모든 재료와 내용이 유기적 부품으로써 존재해야 한다. 예술에서의 완벽함이란 그 자체로 온전한 예술의 절대성과 존속성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걸작이라는 표현이 대중성을 완전히 피해 갈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발표 시점부터 걸작이라 불리는 작품이든, 창작자 사후에 재발견되어 걸작이라 불리는 작품이든 이 같은 표현은 어디까지나 대중들의 평가로부터 시작된다. 개중에는 시대상을 투영해 특정 사회의 공통 정서를 고양시키는 작품도 있는 반면, 동시대 타 창작자들의 추월을 불허하는 압도적인 감각으로 인간 본연의 원초적 감성을 일깨우는 작품도 있다. 하지만 작품의 이러한 면모는 창작자의 기능적 혹은 특성적 기술만을 비춘다. 다시 말해, 작품에서 드러나는 사회적 (혹은 인본적) 의미는 대중의 입장에서 감상 시에 감안해야 할 작품의 콘셉트일 뿐, 작품 자체의 수준과는 별개의 영역이다. 만약 완성도가 결부된 작품을 작품이 불러일으키는 감성만으로 평가해 추앙한다면, 어린아이의 낙서를 피카소의 회화와 견주어 보는 행위와 무엇이 다른가?
결론적으로 이 세상 모든 걸작들의 필수불가결한 전제조건은 완성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