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든 사람들

엔딩 크레딧 (Ending credits)

by 이강훈

'걷다 보면 길이 된다’고들 하지만, 지역개발의 현장에서는 종종 그 반대가 된다.

길을 내면, 언젠가는 누군가 걷겠지라는 막연한 기대가 먼저 앞선다.

유형별로

트레킹길 / 둘레길 / 산책로 / 순례길 / 치유길 / 걷고싶은길 / 탐방로 / ㅇㅇ코스...

설치 주체에 따라

지자체, 산림청, 국립공원, 종교단체, 주민조직, 관광과, 건설과...

재료별로도

황톳길 / 데크길 / 목재길 / 자갈길 / 흙길...

찾아보면 실크로드도 있을 만큼 목적에 따라 다양하고 많은 길이 있다.


걷기 좋다는 말은 많지만, 누구를 위한 길인지, 어떤 경험을 남기려는지에 대한 질문은 잘 보이지 않는다.

예산이 많다면 새로 길을 내거나 무장애 나무데크길을 만들어 예산을 소진할 것이고,

돈이 없다면 있던 길의 길목마다 안내판만 설치하면 될 일이다.


그러면서도 잊지 않는 것이 안내판에 빠지지 않는 <만든 사람들>이다.

“공간에는 늘 ‘만든 사람들’의 말이 남는다.”


<산불 조심> 같은 직접적인 말은 줄었지만,

디자인을 거쳐 구조물로 세워진 안내와 경고는 여전히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


"휴대폰 챙겼어?

추우니까 목도리도 챙겨야지.

건널목 건널 때는 말이야....."

자식에게 하는 잔소리는 듣기 싫어도 애정 어린 마음의 표현일지 모르지만,

대상이 다 큰 어른이라면 때로는 오지랖이 되고 만다.

이 말들이 공간의 안내판으로 옮겨오면, 그 순간부터 애정은 안내가 아니라 통제가 된다.


이런 애정어린 안내판들을 설치하는 이유는 대게 두 가지다.

① "내가 만들었어요.."

② "내가 분명히 조심하라고 했죠?"


설치 자체가 문제라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설치 위치나 주변환경에 대한 고려는 기본 중에 기본인데 안내판들이 너무 쉽게 설치되고 만다.

그렇다고 설치를 위한 가이드라인 작성, 이를 위한 선진사례 답사와 자문회의가 잇따를 예정이라면

차라리 포기하고 이 안내판과 시설물로 둘러싸인, 한국적인 위요경관에 적응해 가는 편이

사회적 비용 절감 측면에서는 더 이로울 것이다.

국내 어느 지자체의 생태탐방로 내려가는 입구에 있는 안내사인들 전경

이 길은 평지인 데다가 오래 걸으면 멀리 왜가리도 보이고, 가끔 예쁜 꽃도 만난다.

걷는 동안 풍경은 평온했지만, 감정은 반대로 흐른다.

1구간, 2구간, 3구간.... 무지막지하게 긴 이 길을 걷다 보면 내 생각은

낯선 사람을 만나지 않을까? 하는 뭔가 튀어나올 것 같은 두려움으로 향한다.

<절대 여성들은 걷지 마시오>라는 또다른 안내판도 문득 떠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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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좋아서 덥진 않았지만 간신히 찾아낸 즐거움들

미국의 친수공간들에도 설치물은 있지만,

구체적인 서식종을 안내한다고 하더라도 주변환경과의 조화를 고려할 수밖에 없다.

Coastal Wetlands Sign(워싱턴주 프라이데이 하버) - 제작사 : Partners in Design

위에 보이는 안내판의 제작사는 "안내판에 표시된 아름다운 삽화, 주변 환경과 완벽하게 어우러지는 액자식 디자인이 멋진 작품을 완성해 냈다"라고 자찬했다.


이런 자찬이 과하지 않게 느껴지는 이유는

자연스러운 나무 기초에 정교한 일러스트가 들어간 액자 형태의 구성,

가까이 서서 보는 사람들에게는 완성도 있게 정보를 주는 한편,

멀리서 보는 그 형태와 질감은 주변 경관에 이질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위의 사례처럼, 설치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어느 위치에 어떤 방식으로 설치하느냐가 관건이다.


무분별한 안내판 설치는 어느 한 지역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부분 지역에서 설치 강박에 시달린다.

왜 설치하는지 고민하기에는 추가 비용이나 여유로운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


다만, 마구잡이로 설치된 안내판들을 보면, 제작자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설치했을지 궁금해 진다.

한 번에 설치하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는 설치를 위해 땅을 파고 또 판다.

경고판을 세우고, 다시 안내판을 설치할 때,

등뒤에 서서 지켜보는 선배 안내판들의 음산한 기운을 느끼지 않았을까?


저 사진도 몇 년 전 사진이기 때문에 지금은 더 설치됐는지 줄어들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이런 생각조차 필요 없을 만큼, 주민과 시민, 방문객들은

이미 나보다 더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돈을 들여서 산의 가장자리를 깎은 길과

그 길 위에 설치된 안내판들이 무색하게도,

그리고 '낯선 사람을 만나지 않을까?' 하는 기우와는 다르게

적어도 내가 세 시간가량 길을 걷는 동안,
이 길을 만든 사람들을 포함해서
난 어느 누구도, 단 한 명도 만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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