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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은진 Apr 10. 2021

하나의 김밥 같은 세상 속에서

더 자두, <김밥>

예전에 김밥 속에 단무지 하나

요새 김치에 치즈 참치가

세상이 변하니까 김밥도 변해

우리의 사랑도 변해


더 자두, 김밥











 사실 이 노래는 친구 때문에 처음 알게 되었다. 말을 할 때마다 김밥 노래의 후렴구인 ‘잘 말아줘~ 잘 눌러줘~’라고 불러서 대체 무슨 노래를 부르나 했다. 90년대에나 나왔을 줄 알았던 노래가 의외로 2000년대에 나와서 놀랐고, 단순한 노래지만 가사가 재미있어서인지 가끔씩 후렴구를 중얼거리게 된다.



 어릴 적에는 참 김밥을 많이 먹었다. 초등학교 때 봄 소풍, 가을 소풍을 갈 적이면 항상 엄마가 싸주던 도시락에는 김밥이 들어갔으니 말이다. 일반 밥을 싸가는 것보다 간편하게 먹을 수 있었고 주먹밥보단 김밥을 좋아하니 내 점심 메뉴 중 열에 아홉은 김밥이었다.



 소풍 날 아침 엄마가 일찍 일어나 김밥 재료를 다 준비한 뒤 김밥을 싸는 걸 보고 있다가 항상 꽁다리를 얻어먹기도 했다. 그뿐이랴, 가족이 많으니 내가 먹는 것 외에도 대략 열 줄은 싸서 아침 식사도 김밥으로 먹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당시 3줄, 많으면 4줄까지 잘라가 2단 도시락과 함께 물, 간식을 싸 들고 당당히 소풍을 나갔던 때를 생각하면 참 아득하다. 향긋한 풀밭 위에 돗자리를 깔고 나무 그늘 아래 터를 잡으면, 시원한 바람이 머리를 간질이고 신발을 놓아두지 않은 돗자리 모서리가 항상 위로 올라왔다. 가방으로 모서리가 접히지 않도록 단단히 막은 뒤 친구들과 각자의 도시락을 자랑하며 나누어 먹던 시절. 시간이 흐르면서 그런 여유를 가질 수 없어졌다는 게 아쉽다.



 그렇다고 해서 엄마의 김밥을 먹지 못하게 된 건 아니다. 내 밑으로 세 명의 동생이 줄줄이 소풍을 갈 때마다 엄마는 꾸준히 김밥을 싸거나 주먹밥을 만들었다. 더 이상 소풍을 갈 수 없게 된 요즘은 가끔 몇 달에 한 번씩 주말에 날을 잡아 김밥을 싼다. 한입에 먹기 좋게 자른 김밥도 좋고 그냥 길게 만 김밥을 이로 잘근잘근 뜯어 먹는 것도 좋다.



 바깥 김밥집에서 파는 김밥과 다르게 우리 엄마가 싼 김밥엔 한 가지 특별한 재료가 들어가는데, 그건 바로 할머니가 담근 김치다. 재료 속에 김치 두 줄 정도를 넣어주면 적당히 매콤하고 아삭아삭 씹히는 맛이 있다. 정확히는 할머니의 특별한 재료라고 말해야겠지만, 어쨌든 우리 집만의 김치 김밥은 어디에서도 먹을 수 없는 김밥이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흔히들 알고 있다시피 김밥은 한국인의 ‘소울 푸드’라고 할 만큼 친숙하고 정겨운 이미지를 갖고 있다. 특히 엄마의 김밥이라고 하면 무언가 감동적인 스토리나 어릴 적 그리운 추억의 음식으로 인식되지 않는가. 김밥은 특별한 날에 먹는다는 인식이 강하게 박혀있기 때문인지, 저마다 각자가 기억하는 김밥이나 그에 관련한 이야기가 있는 것 같다.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이야기가 한데 모여 하나의 공통 관심사를 만들어내듯, 세상은 다양한 재료를 겹겹이 쌓고 말아 올린 김밥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게 말하면 ‘샐러드 볼 사회’처럼 다채로운 사람들과 문화가 모인 걸 수도 있고, 나쁘게 말하면 작은 세상 안에 모든 것을 이것저것 욱여넣은 아슬아슬한 상황 같기도 하다. 물론 김밥 같은 세상을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 요즘의 세상은 마치 옆구리가 터지기 직전인 김밥처럼 보인다.



 자고로 김밥이란 각자 다른 재료가 한데 모여도 서로의 부족한 곳을 빈틈없이 채워주며 조화로운 맛을 내는데, 우리나라의 상황은 어떤가? 코로나 19라는 거대한 팬데믹이 들이닥치기 이전에도, 한국 사회는 다양한 사회 문제로 인해 위태위태했다. 어느 하나를 콕 집어 말할 수 없는 것이, 어떤 주제를 선택하든 그 안에 있는 문제들이 하나둘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서로 화합하지 못하고 문제와 관계를 외면한 채, 어떻게든 꾸역꾸역 버티고 사는 우리의 인생이 참 각박하게 보이기도 한다.



 다만 그 ‘꾸역꾸역’을 부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떤 시련과 문제에도 굴하지 않고 살아가려는 사람들의 생활력과 의지만큼은 비난할 수 없다. 코로나 상황에도 포기하지 않고 서로 배려해 마스크를 쓰고, 외출을 자체하며 다시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온갖 범죄가 난무하는 세상 속에서도 피해자를 돕고 가해자를 비판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과학기술의 급속한 발전과 달리 발전하지 못한 윤리의식 때문에 껍질이 벗겨진 사이버 범죄 역시, 끔찍한 세상의 일면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문제를 없애기 위해 들고 일어선 사람들의 밝은 면을 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라는 찰리 채플린의 명언이 있다. 꾸역꾸역 싸서 옆구리가 터진 김밥도 먹으면 맛이 좋은데, 꽉꽉 눌러 합쳐진 우리 사회도 멀리서 보면 제법 멀쩡한 모양새를 취하고 있지 않은가? 너무 아슬아슬해 한 재료가 바깥으로 팍 튀어나오기만 해도 찢어질 것 같지만, 이 작은 나라 안에서 수많은 것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김밥’이라는 작은 음식 속에서 개개인의 다양한 추억과 이야기, 레시피를 발견할 수 있듯이 우리 사회라는 하나의 김밥 속에서도 긍정적인 면모를 발견할 수 있기를 고대한다. 사회의 다양한 문제로 재료를 썩히는 대신, 더 긍정적이고 밝은 이야기들이 언론으로 나와 사람들이 이 팍팍한 삶 속에서 그나마 숨을 쉬고 살아갈 수는 없는 걸까? 다양한 사람, 다양한 문화, 다양한 문제와 이해관계 등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며, 또한 존중하며 좋은 에너지라는 조미료로 김밥을 잘 말 수만 있다면, 그 맛은 어떤 것보다도 진국일 것이다.



 항상 우리를 위해 김밥을 싸준 엄마를 위해, 최근에는 내가 김밥 재료를 사서 직접 김밥을 선보였다. 레시피도 제대로 보지 않고 아침마다 김밥 재료 준비를 하던 엄마의 모습을 떠올리며 어리숙하게 재료를 늘어놓았다. 계란지단을 부치고 김밥 햄을 잘라 달군 팬에 살짝 굽고, 단무지와 우엉 물을 잘 빼고 맛살은 먹기 좋은 길이로 주욱 찢었다.



 김밥 김 위에 한 김 식힌 밥을 올려 잘 펴 발라준 뒤 재료를 올린다. 그리고 우리 가족만의 특별 재료인 할머니의 김치도 찢어 올려준 뒤 김발과 함께 잘 말아 꾹꾹 모양을 만들었다. 그다음 김밥을 기다리고 있는 가족들을 위해 먹기 좋게 칼로 썰어주면 완성이다.



 레시피를 보지 않은 탓일까, 계란지단을 부친 뒤 나중에 칼로 하나하나 잘라야 한다는 걸 모르고 나는 지단을 말아 계란말이를 만들어버렸다. 그래서 김밥이 두꺼워지고 몇 줄은 자르던 와중 터지기도 했다. 둥글고 예쁘게 말아도 아직 써는 기술까진 습득하지 못해서 쭈글쭈글한 세모 김밥이 되어버렸지만, 가족들이 맛있다며 먹어주는 모습을 보니 뿌듯했다. 어쩌면 이런 마음으로 요리를 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먹고 살기 위해 대충 끼니를 챙기는 게 아닌, 함께 식사를 같이할 사람들을 생각하며 요리하는 일의 기쁨.



 김밥 이야기를 하니 또 어디론가 놀러 나가고 싶다. 날씨야 좋지만, 미세먼지는 가득하고 코로나 때문에 마스크를 함부로 벗을 수 없으니 더욱 아쉬운 날이다. 이맘때쯤 만개한 벚나무 아래서 벚꽃을 보며 도시락을 먹을 수 있다면 정말 좋을 텐데. 잃어버린 추억을 회상하며 살아가는 일상이 야속하게 느껴진다.






매주 토요일, 좋은 노래와 함께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3~5분에 달하는 노래 한 곡과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에세이를 가져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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