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 제로부터 시작하는 이세계 생활 3장에서 6장까지
10월의 독서 리뷰/프리뷰라고 했지만 이번 독서 리뷰는 사실상 re : 제로부터 시작하는 이세계 생활(이하 리제로)의 3장부터 6장까지 분량 리뷰입니다. 그러면 10월 내내 이 책만 읽었냐고 물어보신다면, 뭐 사실상 그렇다고 봐야겠죠? 10월 내내 이 책만 읽었습니다. 그리고 읽지 않는 시간에는 이력서를 써서 보내고, 잠깐 기분전환 삼아 여행도 다녔어요.
리제로에 대해서 간단하게 밑바탕을 깔고 시작하면 리제로는 루프물 형식의 판타지 소설입니다. 거기에 부가적으로 군상극과 추리 서스펜스물의 색채가 같이 끼얹어지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루프물이라는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요. 아마 판타지 장르, 문법이 익숙하지 않으신 분들은 루프물이라는 단어 자체가 생소하실 수도 있는데, 오늘은 리제로의 이야기에서 조금 벗어나 이런 장르적 문법에 대한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다루면서 리제로에 대한 서평을 남겨보려고 합니다.
일단 타임루프물, 그러니까 루프물이 뭔지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전에 몇 작품을 바닥에 깔아놓겠습니다. 이 중에 하나라도 본 작품이 있다면 이해하기 쉬우실 겁니다. 엣지 오브 투머로우(2014), 시간을 달리는 소녀(2006), 닥터 스트레인지(2016), 어바웃 타임(2013), 시그널(2016), 혹시 본 작품이 있으실까요?
루프물이란 특정 인물이 일정한 시간대로 계속해서 회귀하면서 이 사건을 해결하는 작품을 총칭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건은 말 그대로 주인공이 겪는 절체절명의 위기일 수도 있고, 더 좋은 미래로 가기 위한 노력일 수도 있고, 아니면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루프 그 자체일 수도 있어요. 어쨌든 이 장르의 기본적인 문법은 주인공이, 같은 스토리 라인을 반복하고, 그 과정에서 변주를 주면서 스토리를 개변시킨다.라는 문법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리제로는 전형적인 루프물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루프물은 참신한 설정으로 초반에 이목을 끌 수는 있어도 롱런을 하기 위해서는 치밀한 스토리가 깔려야 하는 장르예요. 처음 루프를 이용해 난관을 극복하는 모습은 독자, 혹은 관객으로 하여금 고난을 이겨내는 인간찬가라는 감정과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킬 수 있지만 같은 방식의 고난이 반복된다면 그건 똑같은 스토리의 영화를 2편, 3편까지 챙겨보는 것과 같으니까요. 그렇기에 작가는 루프의 변곡점을 다양한 포인트에 둡니다. 반나절 이후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건에 휘말려 죽는 루프를 극복했다면 다음에는 갑자기 3일 후, 다음에는 15분 후와 같은 시간에 따른 변곡점을 배치해 보고, 단순히 시간축이라는 개념을 넘어 마녀의 잔향이라는 소설 내 설정을 통해 루프 할 때마다 마주하는 사람들의 반응이 달라지는 식으로 인물 변곡점을 배치해보기도 하면서요.
이런 다양한 변곡점이 추리 서스펜스로서의 가치를 빛바래게 만들 거 같다고 생각하시는 분도 있을 겁니다. 이건 특수설정 미스터리들이 가지는 딜레마와 같아요. 특수설정을 치밀하게 집어 넣으면 이 또한 추리의 한 단서가 되지만 설정이 범람해버리면 그때부터는 추리의 본질이 훼손되니까요. 분명 독자가 지금까지 나온 단서를 통해 어느정도 추리를 해야할 수 있어야 하는데 독자에게 제공되지 않은, 이 세계에만 존재하는 독자적인 개념으로 인해 전혀 다른 정답이 나올 경우가 보통 그런 상황이겠죠. 하지만 리제로의 초반부는 그런 걱정을 기우로 만들만큼 깔끔한 형식의 추리물을 보여줍니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주인공의 사망 사유, 그리고 주인공 주변의 조력자들, 마지막으로 세계관의 특성에 있습니다. 일단 주인공의 사망 사유는 보통 물리적인 경우가 많아요. 누군가의 칼에 찔려 죽었는데 칼로 찌른 사람이 눈에 띄는 특징을 가진 쾌락살인마거나, 누군가가 휘두른 철퇴에 죽었는데 이런 무기를 쓰는 사람이 한정되어 있는 식으로 왜 내가 죽었는지는 몰라도 누가 죽였는지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다는 점이죠. 그리고 주인공이 마법, 주술적인 사유로 죽었을 경우 이에 대해 즉각적으로 정보를 줄 수 있는 조력자가 주변에 있다는 점도 독자로 하여금 추리물의 기분을 느끼게 해줍니다. 정보의 통제가 적고 새로 발생한 문제에 대한 정보를 100%는 아니어도 70~80%까지는 제공해준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기에 독자 스스로도 상황을 파악하고 꼬리를 잘 맞춘다면 답까지 찾아낼 수 있는 구조가 이어집니다. 마지막 세계관의 특성은 간단히 이야기하면 특별한 세계지만 특별하지 않은 세계라는 개념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마법이 존재하지만 마법을 활용하는 인원은 소수에 불과하고, 만약 대응할 수 없는 마법이나 재해에 휘말린다면 그쪽 루프는 아예 포기하는 식으로 접근하기에 독자의 추리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을 사전에 차단해버린다는 뜻입니다. 애초에 이 이야기는 루프물, 그러니까 범인을 찾는 이야기가 아니라 안전한 미래를 찾는 이야기니까요. 위험한 길을 알았다면 굳이 그 길이 왜 위험한가를 따질 필요가 없겠죠.
이런 방식의 전개는 4장까지 진행됩니다. 스토리로 이야기하면 백경을 토벌하고 대토를 토벌하는 타이밍까지입니다. 5장부터는 이야기가 조금 바뀝니다. 이제는 군상극의 형식으로 넘어가게 돼요. 이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주인공의 무능함이죠. 주인공은 지금까지 죽고 살아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자신이 어째서 죽었고, 이런 루트를 이어가면 누가 죽고 사는지, 어떻게하면 최적화된 루트를 걸어갈 수 있는지를 홀로 돌다리 두드리듯 파악하며 풀어나갔습니다. 하지만 세계관의 스케일이 커지면서 더이상 개인의 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부분에 봉착한 거죠. 지금까지 루프 클리어 조건이 위협 1개 돌파, 혹은 연달아 발생하는 위협의 돌파였다면 이제는 같은 시간축에 발생하는 동시다발적인 위협의 돌파로 바뀐다는 이야기죠.
그렇기에 4장에서 '오토 스웬'과 주먹 다짐을 하며 나누는 이야기는 이 소설의 꽤 큰 분기점중 하나라고 꼽을 수 있습니다. 3장부터 함께 여정을 해 온 상인 오토 스웬은 4장에서도 약방의 감초와 같은 역할을 맡아왔습니다. 루프마다 사람들 사이의 중재나 연락책, 이동이 가능한 장기말과 같은 역할을 다양하게 수행해왔죠. 하지만 마지막 루프에서 그는 지금까지 맡아왔던 역할과는 다른 '친구'라는 이야기를 꺼내며 비즈니스 파트너가 아닌 친구로서 도와주겠다는 말을 합니다. 4장까지 끊임없이 죽음을 반복하며 스스로의 힘만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주인공에게 이 말은 더이상 홀로 무거운 짐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로 다가왔고, 이 부분은 주인공이 주위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고 다가가는 계기가 되었어요. 즉 이제 외로운 추리의 시간을 벗어나 다른 이의 힘을 빌릴 수 있는 시간이 온 셈이죠.
5장부터는 이야기가 격변합니다. 주인공에게 주어진 시간은 15분, 15분 내에 주인공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는 역경을 극복해야 합니다. 이는 혼자만의 능력으로는 절대 돌파할 수 없는 난관, 그렇기에 그는 다양한 인물들의 힘을 빌리게 되고 그 과정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이 저마다 품고 있는 이야기를 독자에게 보여주기 시작해요. 그래서 5장부터는 추리물이 아닌 군상극으로 독자에게 다가가는 거죠. 세계관 최강자이자 완전무결한 기사인 라인하르트는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는 인물인가, 4장에서 우리를 괴롭혔고 또 도와줬던 가필 틴젤은 어떤 내면 세계를 지녔고 슬픈 과거사를 가진 인물인가.
롱런하는 작품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장르소설을 쓰려고 하는 작가들은 이런 롱런하는 작품의 사유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과거에는 루프물이라는 이유만으로 호평받는 작품들도 있었어요. 하지만 이제는 단순히 루프물이라는 이유만으로 호평받는 시대가 아닙니다. 작가들의 장르에 대한 탐구가 깊어졌고, 단순히 한 장르를 심도있게 쓰는 수준을 넘어 입체적인 작품을 풀어내야 하는, 그리고 그런 작품을 파악할 줄 아는 독자가 늘어난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2014년부터 꽤 오랜 시간 장르소설 시장을 달궈온 교과서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본적인 기틀은 루프물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루프물의 문법에 대해 깊게 파악하고 있기에 단순히 선택지형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과 같이 A라는 분기 뒤에 B라는 분기를 반복해서 놓는 식의 접근으로 이야기를 풀어내지 않고 다양한 포인트에 변곡점을 줘서 독자에게 반복되는 루프 속에서도 참신함을 선물해줬어요. 전반부는 추리 서스펜스물의 특징을 잘 살려서 특수설정 미스터리의 분위기를 내줬습니다. 특히 특수설정 미스터리는 2010년도 초반부터 장르소설 시장을 뜨겁게 달궜던 추리 장르에요. 이런 장르의 유행도 작품의 인기에 보탬이 되었을 겁니다. 독자는 작가의 생각대로 주인공을 무능한 인물이 아닌 죽음을 반복하는 탐정이라 생각하고 이야기를 함께 따라갈 겁니다. 물론 과정에서 답답한 부분도 있고 어리숙한 부분도 있어요. 하지만 주인공의 성장은 이런 답답함을 씻어낼만큼 독자에게 시원함을 줍니다. 그러니 읽는 중도에 너무 힘들어 하차하지만 않는다면 작품이 주는 카타르시스에 눈을 떼지 못하겠죠.
더이상 단순 추리만으로 이야기를 풀어내지 못하는 시점부터 작가는 절묘하게 작품의 서브 장르를 특수설정 미스터리에서 군상극으로 변경합니다. 그래서 정신적 성장을 이룬 주인공을 기둥으로 둔 상태에서 주위 인물들을 다루고 주위 인물들의 배경과 성장을 함께 다루죠. 물론 모든 인물이 성장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주인공이 아니기에 자신이 처한 상황을 타개할 수 없고, 누군가는 분명히 씁쓸한 뒷맛을 남기며 이야기에서 퇴장합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 또한 사람 사는 이야기고 군상극의 일부입니다. 오히려 모두 성장하고 모두 행복해진다면 그건 이야기의 현실성이 부족이 아닐까요?
3장에서 6장까지의 이야기는 이렇게 마무리가 됩니다. 그러면 7장은 어떻게 이야기가 이어질까요. 주인공이 많은 성장을 이뤘다고 해서 초인적이고 완성된 인물이 된 것은 아닙니다. 주인공은 여전히 이 각박한 세계에서 무능력한 인물이에요. 거기에 수없는 죽음을 겪으면서 주인공의 정신 또한 굉장히 많이 망가진 상태입니다. 그런 그에게 어떤 새로운 도전과 고난이 기다릴지, 멀지 않은 미래에 7장부터 다시금 이야기를 읽어가겠습니다.
그리고 이와 별개의 이야기로 최근 '쓰르라미 울 적에'라는 고전 키네틱 노벨을 플레이하고 있습니다. 2002년 작품니까 벌써 20년이 넘은 작품이네요. 이 작품도 일본 동인 시장을 뒤흔들었던 루프물이자 추리 서스펜스물입니다. 당시에는 이런 소설에 목소리만 입힌듯한 키네틱 노벨 형식의 작품이 많이 나왔어요. 오늘날로 치자면 단행본 없는 오디오북이라고 할까요? 플레이어가 게임에 개입할 여지는 없고(한마디로 선택지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흘러가는 텍스트와 목소리만 들으면서 이야기를 따라가는 게임이죠. 이렇게까지 설명하니 이걸 게임이라고 말하는 게 맞는지도 잘 모르겠네요. 게임과의 공통점은 컴퓨터로 가동한다는 점 빼고는 없는 거 같은데 말이죠.
어쨌든 이 작품이 시장에서 각광받았던 이유는 신, 전설, 도시괴담과 같은 개념을 접목시켜 인간이라면 하지 못했을 법한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고 결국 이 사건의 정답에는 인간이 놓여있다는 스토리라인을 보여줬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야기를 보고 있으면 정말 이게 신이라는 존재가 개입하지 않은 거 맞아?라는 생각이 드는 사건들이 발생하고는 합니다. 갑자기 사람이 사라진다던지, 시체가 발견된다던지 하는 식으로요. 하지만 결과적으로 모든 사건은 인간의 손에서 발생한 겁니다. 그리고 그 사유에 대한 복선도 꽤나 탄탄하게 깔아놓습니다. 그래서 찜찜하면서도 그 사유를 곱씹어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납득하게 되어버리는 거죠. '쓰르라미 울 적에'는 이후 OSMU되어 다양한 형식으로 미디어 믹스됩니다. 애니메이션도 나오고, 만화책도 나오고, 게임도 나오고, 이 인기가 거진 2010년도 초반까지도 이어졌으니 꽤나 수명이 긴 컨텐츠였다고 할 수 있겠네요.
11월에는 새로운 책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읽을 책도 많고 읽고 싶은 책도 많으니까요. 기왕이면 어디에 자리잡은 다음 편하게 책을 읽을 수 있는 나날이 오면 좋겠는데 그게 쉽지 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