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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병, 오지랖이 빛을 발하네

by 제이프

어렸을 때부터 유독 정리하는 것을 좋아했다.

물건을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기록을 정리하는 것 말이다.


중, 고등학교 때도 문제집을 풀고 틀린 문제가 있으면, 그 문제들을 따로 오려서 오답노트에 붙여놨다.

여러 권의 문제집을 풀고 나서, 공통적으로 익혀야 하는 개념은 나만의 개념 노트를 만들었고 시험 직전에는 그 내용만 보기도 했다.


물론 정리를 하고 있는 시간에 문제를 하나 더 푸는 게 효율적일 수도 있고, 누군가는 그 과정이 '쓸데없는' 시간낭비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나만의 정리 시간이 오히려 개념을 한번 더 익히고, 리마인드 하는 시간이 되었다.


지금까지도 수험생 때 정리 노트는 아까워서 못 버리고 보관을 하고 있다 ㅎㅎ

오늘은 나의 정리병, 그리고 또 하나의 특징인 오지랖이 성인이 되어 빛을 발하고 있는 순간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1) 정리병을 꾸준히 실현했더니, 고객사로부터 업무 수주 문의가 왔다.


프리랜서 마케터가 되기 전, 나의 마지막 커리어는 퍼포먼스 마케터였다. 문득 마케터가 되기 위해서는 데이터를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최소한 메타, 구글, 네이버, 카카오와 같은 매체를 다루고 세팅하는 법을 내가 직접 익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작정, 5년 차 마케터가 퍼포먼스마케터 신입으로 지원을 했고, 그렇게 직장에서의 마지막 커리어가 퍼포먼스마케터가 되었다.


어쨌든, 처음 접한 퍼포먼스는 나에게 모르는 것투성이, 즉 새로운 것 투성이었다.

퍼포먼스 마케팅에서 주로 사용하는 용어부터, 광고 세팅 방법, 매체별 효율 측정 방법 등, 모든 것이 생소하고 어려웠다.


무엇보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새로 신입이 되었던 중고 신입이었기에, 더 빠르게 익히고 더 빠르게 능숙해지고 싶었다. 몰랐던 용어, 새로 알게 된 개념, 그리고 선배들한테 질문했었던 리스트들을 항목별로 나눠, 노션에 적어두었다.


꼭 보기 좋게 잘 정돈되어 있지 않더라도, 문득 생각날 때마다 노션에서 검색을 해보면, 지난번에 몰랐었던 히스토리가 남아 있어, 업무를 진행하는 데에도 꽤 도움이 많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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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포먼스마케터일때 노션에 정리했었던 실무 개념 및 정보들


그러다 문득, 이 내용들을 나만 알고 있기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실무를 해야만 알 수 있는 나름 꿀정보들이 많았기 때문에, 분명 다른 사람들도 이런 정보가 필요할 것이라는 오지랖이 갑자기 생겼다.

네이버 블로그 계정을 만들었고, 노션에 있던 내용을 하나씩 블로그로 옮기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까지도 실무를 하며 잘 생각나지 않는 개념이 있으면, 내 블로그에서 검색을 해서 정보를 찾아본다.


어쨌든 큰 목표 없이, 내가 오지랖을 부리고 싶은 내용이 있을 때마다 그 내용들을 정리해서 블로그에 올렸고, 적게는 하루에 10명에서 많게는 200명까지도 블로그에 들어오는 듯했다.


그러던 어느 날, 프리랜서 마케터로 한창 업무를 하는 중 네이버 블로그에 연동해 놓은 메일 주소를 통해 상담문의가 왔다. 블로그에 콘텐츠 마케팅에 대한 글을 한동안 계속 정리해서 올렸는데, 그 글을 보고 궁금한 것이 있다고 했다.


노션3.JPG 블로그를 보고 문의를 주셨던 현재의 고객사


결론적으로, 당시에 나에게 문의를 주었던 업체는 현재 나에게 고객사가 되어, 서비스의 콘텐츠 및 브랜드 마케팅 전반의 업무를 맡겨주고 계신다.


정리병과 오지랖이 이렇게 빛을 발할 수도 있구나.

아직까지도 이런 기회가 왔다는 것이 신기할 뿐이다.



2) 은근 자신감과 자존감의 원천이 된다.


어느 날은 블로그에 메타 광고 세팅에 대한 댓글이 달렸다. 아마 퍼포마라면 알겠지만 메타는 정말 알 수 없는 오류에 시도 때도 없이 시달릴 때가 많다. 원인불명일 때도 많지만, 내가 아직 모르고 있는 실무진만이 알고 있는 방법도 많기에, 나는 댓글로 내가 알고 있는 방법을 최대한 알려주었다.


블로그 댓글은 답변이 느릴 테니,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을 열고 이쪽으로 문의를 주면 빠르게 답변해 주겠다는 오지랖?을 부렸다.


당시에 나는 퍼포먼스마케터로서 약 1년 차였기 때문에, 사실상 누군가를 알려줄 만한 실력은 되지 않았다. 그런데 뭐 어때? 내가 알고 있는 선에서 최대한 알려주고, 모르는 부분은 모르겠다고 하면 되지!


나에게 질문을 했던 사람은 이제 막 취직을 했던 신입마케터로서, 페이스북 기초 세팅에 대한 질문을 나에게 했다. 나는 내가 1년 전 시달렸던 내용들을 설명해 주며, 내가 알고 있는 선에서 최대한 답변을 드렸다.


그는 나에게 생명의 은인이라며, 앞으로 하는 일 모두 잘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며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줬다. 생명의 은인일 것 까지야 ㅎㅎㅎ 그래도 누군가가 내 삶의 여정을 응원해 준다는 말만이라도, 기분이 참 좋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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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은 블로그에 연동된 계정으로 메일이 하나 왔다. 본인이 현재 군인 신분인데, 제대를 한 후에 마케터가 되고 싶다며 조언을 해 줄 수 있냐는 문의였다. 군인 신분으로서 마케터 준비를 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들과, 미리 준비해 두면 좋은 일들을 물어봤고, 약 3-4번의 메일을 오가며,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최대한의 정보를 알려줬다.


마지막에 그분은 너무 감사하다며 언젠가 본인이 마케터로 취업을 하게 된다면 연락을 드리고 싶다고 했다. 엥? 나에게는 별거 아닌 정보가 누군가에는 감동의 순간이 될 수도 있구나..


흑백요리사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유명해진 '안성재 셰프'는 한 프로그램에 나와서,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지켜보고 있구나. 똑바로 살아야겠구나 를 느꼈다고 했다.


물론, 나는 방송에 나오는 사람도, 얼굴이 알려진 사람도 아니지만 그 와중에 누군가는 내 글을 보고 내가 하는 일을 지켜보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지켜보고 있구나... 내가 그래도 잘하고 있구나.

은근 자신감과 자존감, 열정의 원천이 된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하고 싶은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딱히 잘하는 일도 없었다. 중, 고등학교 때는 그냥 할 수 있는 게 공부밖에 없어서 공부를 열심히 했고(자랑이 아니라.. 노는 법도 잘 몰랐다..), 대학교 때는 충실하게? 대학생활을 즐겼다.


부러운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자기가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을 명확하게 찾아 한 우물만 파는 사람이었다. 되던 안되던 그 열정이 부러웠다.


늦은 나이에? 나의 진로에 대해 계속해서 고민하며, 내가 어렸을 때부터 나도 모르게 꾸준히 했던 습관을 찾아보니 그중 하나가 기록이었다.


오답 노트를 정리했고, 매일 해야 할 투두리스트를 다이어리에 정리했고, 여행을 다녀오고 나면 갔었던 여행지, 밥집, 썼던 비용 등을 다녀와서 기록을 해놨다.

심지어 연애를 할 때는 남자친구와 방문했었던 음식점과 카페들도 엑셀에 기록을 하더라...


이제 보니 내가 잘하는 것, 좋아하는 것이 기록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일과 접목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다가.. 현재는 '기록을 콘텐츠화' 하는 일을 하고 있다.


기록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 억지로 모든 것을 기록하라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다.

지금 내가 무심코 아무 생각 없이 꾸준히 하는 일이 무엇이 있는지를 잘 살펴보라는 말을 하고 싶다.


비록 지금은 '쓸데없고 시간낭비'를 하는 일이라고 생각이 들지라도, 무언가를 꾸준히 하다 보면 그것이 내 삶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이자,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일, 그리고 나에게 돈을 벌어다 줄 일이 되는 순간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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