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여행기, 조금 두서없는.
*이 칼럼은 두서없이 흘러 내려갑니다. 편안하게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가을이 막 문턱을 넘기 시작하던 9월 말, 공기 속에 스치는 바람이 조금씩 부드러워지던 시기에 저는 오랜만에 늦은 여름휴가를 떠났습니다. 계절이 바뀌는 시점의 여행은 늘 묘한 설렘이 있습니다. 한 계절이 끝나가는 감상과 다음 계절이 다가오는 기대감이 교차하니까요.
이번 여행지는 제가 서울 다음으로 애정을 갖고 있는 도시, 바로 도쿄였습니다. 휴가를 '휴식'보다는 '경험'을 하는 시간으로 여기는 저는 도쿄가 가장 접근성이 좋은 도시라 자주 찾게 됩니다. 가게 되면 보통 방문하는 백화점 외에 기획 머천다이저에게 도움이 되는 츠타야 서점, 맛있는 야끼니꾸와 시원한 생맥주, 그리고 러닝 하기 좋은 도쿄의 거리. 이 모든 것들이 제게는 서울과는 다른 재미를 느끼게 합니다.
출국 전날 밤, 가방을 싸면서도 괜스레 미소가 났습니다. 티셔츠며 재킷이며 신발까지 이것저것 꺼내 담다 보니 캐리어는 금세 묵직해졌고, 그 무게만큼 마음도 들떠 있었습니다. 공항으로 향하는 새벽의 공기는 차가웠지만, 그 속에서 느껴지는 긴장감과 설렘은 여전히 여행의 시작을 알리는 가장 좋아하는 감정입니다.
비행기 탑승 전 인천공항은 흐린 하늘 아래에 있었지만 제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맑았습니다. 2년 만의 해외여행이자 오랜만의 비행이라 공항의 모든 풍경이 새로웠습니다. 체크인 카운터에서 들리는 수많은 언어들, 게이트 앞에서 졸고 있는 사람들, 면세점의 반짝이는 불빛이 모든 것이 낯설지 않으면서도, 마치 오랜만에 찾은 무대처럼 반가웠습니다.
당시 공항 파업 소식이 있어 조금은 걱정했지만, 다행히 모든 절차가 순조로웠습니다. 비행 시간이 오전 8시라 공항버스 첫차를 타야 했다는 점만이 약간의 피로로 남았습니다. 하지만 활주로를 달리는 비행기 창가 너머로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는 순간, 그 모든 피로가 단숨에 사라졌습니다.
도쿄에 도착하자 반갑게 맞이한 것은 맑게 갠 하늘이었습니다. 서울보다 훨씬 뜨거운 공기, 눈부신 햇살, 그리고 공항 밖으로 나왔을 때 코끝을 스치는 도쿄 특유의 공기와 냄새. 2박 3일 동안 흘린 땀의 양만큼, 오랜만에 느끼는 도시의 그림이 제 안에 새겨졌습니다.
호텔에 짐을 풀고, 여행의 첫 룩으로 갈아입었습니다.
재킷은 톰 포드, 니트는 맨온더분, 팬츠는 수트서플라이, 부츠는 생로랑. 그리고 막 구매한 유나이티드 애로우 ‘뷰티 앤 유스’ 호보백을 들었습니다. 가죽의 묵직한 질감과 나일론 스트랩이 어우러진 디자인은, 세련되면서도 절제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옷을 입고 나가니 매장 매니저님들이 꽤 반응을 해주어 다양한 상품들을 입어볼 수 있었습니다. 캐주얼하게 입고 방문해도 친절한 그들이지만, 옷을 차려입고 간다면 더욱 좋은 접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서울이나 도쿄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도쿄에서 첫 번째 식사는 역시 돈가스와 생맥주입니다. 최근 들어 맥주를 자주 마셔 배가 나오는 것을 느껴 자제하고 있었는데, 도쿄에서만큼은 예외로 두고 마음껏 즐겼습니다. 현지 직장인들이 가는 밥집을 흘러 들어갔습니다. 이 식당은 적당한 가격에 질 좋은 돈가스를 제공하는 정갈하고 조용한 곳이었습니다. 여유로운 시간에 방문하여 안심과 등심 돈가스와 생맥주 2잔을 야무지게 마시고 먹었습니다. 요즘 한국에도 일본식 돈가스를 잘하는 가게가 워낙 많아 큰 차이를 느끼지는 못했지만, 또 막상 도쿄에서 먹어보니 그 맛이 일품이었습니다.
도쿄에서 방문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곳 중 하나는 백화점 그리고 편집샵입니다. 가장 좋아하는 이세탄 멘즈 백화점 (이세탄 백화점이 운영하는 남성 전용 백화점으로 모든 상품이 남성을 위한 상품으로 되어있는 곳입니다.)부터 롯폰기 힐즈, 루미네 까지 다양한 곳을 열심히 돌아다녔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간 도쿄 여행이나 출장을 가면 늘 양손 가득히 옷을 구매했는데 이번에는 작은 가방 외에는 아무것도 사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유는 2가지였는데, 하이엔드 브랜드는 이미 서울에서도 대부분 만나볼 수 있고, 클래식 브랜드는 업데이트가 더디다는 점에서 신선한 자극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 안에서 입고 싶은 옷의 기준이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오프 화이트 재킷, 사이드 어드저스트 블랙 팬츠, 6cm 이상 굽의 첼시 부츠. 이 세 가지로 압축된 제 취향은 ‘정제된 자신감’ 그 자체였습니다.
결국 이번 도쿄에서는 거의 아무것도 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대신, 제 안에 또렷하게 자리한 창작의 욕망이 있었습니다. 언젠가 내 브랜드를 만들어야겠다는 확신이 생겼죠. 이 이야기는 다음 칼럼 *〈아버지의 브랜드〉*에서 좀 더 자세히 풀어볼 생각입니다.
어찌 되었든 덕분에 저는 쇼핑 비용을 아끼는 대신, 더 많은 것을 먹고 즐겼습니다.
둘째 날은 요즘 가장 많이 입는 스타일, 화이트 재킷과 블랙 팬츠 조합입니다. 화이트 재킷 - 어스틴 비스포크, 이너 - they, 팬츠 - 수트서플라이, 부츠 - 생로랑 입니다. 화이트 재킷을 일본에서는 많이 입긴 하지만 여름에 리넨 소재가 혼용된 아이템 위주의 착장이라 가을 소재의 울 재킷을 화이트로 입는 경우는 많지는 않습니다. 결혼식이 아니라면 말이죠. 그래서 더욱 많은 눈길을 받은 날이었습니다.
이세탄 멘즈 백화점 위층, 잠시 들른 카페에서 아이스커피를 시키고 잠시 휴식을 취합니다. 일본은 커피가 한국보다는 조금 가격이 높은 편인데, 풍미와 원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편이라 한 잔 한 잔에 매우 진심으로 대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 커피 한잔이 만 이천 원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백화점이라고 해도 비싸긴 한 편입니다. 재미있는 건 저 옆에 있는 건 우유입니다. 선택지 중 하나였는데 다 마셔갈 때쯤 우유를 넣으니 라테가 된 느낌이긴 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백화점 특유의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도 세상이 다 담겨 있습니다. 우아한 차림의 중년 여성, 브랜드 관계자로 보이는 남성, 그리고 혼자 커피를 마시며 무언가를 적는 사람들. 그 속에서 저도 잠시 ‘도쿄의 일상’에 녹아든 느낌이었습니다. 서울과 다르지 않지만, 어쩐지 더 느긋하고 여유로운 — 그것이 이 도시의 매력입니다.
숙소에서 이른 점심을 먹고 나온지라 저녁때까진 아무것도 먹지 않으려 했지만, 열심히 돌아다닌 덕에 금방 배가 꺼져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간단하게 생맥주에 고기 하나를 먹었습니다. 주문 2개를 했는데 모두 잘못 나와서 컴플레인을 걸어야 할 것 같았지만, 잘못된 메뉴도 맛있어 보여 그냥 먹었습니다.
들어가니 금요일 오후 4시부터 술을 먹는 일본 직장인들 무리에 껴서 먹었습니다. 구운 오리 고기와 대파, 그리고 생맥주였는데 꽤 그 맛이 좋아서 이 애매한 시간에 사람들이 많은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한국에서도 저 크기의 생맥주를 잘 안 먹는 편인데 어째 여기서는 늘 저걸 기본으로 시키는 저였습니다.
저녁으로 찾은 것은 야끼니꾸였습니다. 육류를 좋아하는 저는 일본의 야끼니꾸를 좋아하는데, 처음 도쿄 출장 때 먹어보고 꽤 마음에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일본의 야끼니꾸 방식은 술 한잔에 고기를 먹으면서 소량으로 고기를 굽는 방식에 잘 어울려 저 같은 사람에게 잘 맞는 스타일입니다. 덕분에 둘째 날 먹은 야끼니꾸 식사가 6만 원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또 방문한 가게의 사장님이 한국 분이셔서 많은 서비스를 주시면서 더욱 열심히 먹게 되었네요. 당분간 고기 생각 안 날 정도로 맛있게 먹었습니다.
마지막 날 오전 산책 겸 가벼운 러닝 길에 봤던 주말 아침 도쿄의 모습입니다. 앤틱 한 것에 대해 조예가 깊은 일본 사람들의 취향을 알 수 있는 가게와 우리나라보다 스케이트 보드를 먼저 즐겼던 일본 사람들에게 보드는 위험한 이동 수단 중 하나라는 걸 알려주는 표지판입니다. 저 익살스러운 표지판은 생각보다 많이 보이는 것이 놀라웠습니다.
마지막 날 오전, 호텔 체크아웃을 하고 들른 곳은 '스키야'였습니다. 일본의 저렴한 밥집으로 유명한 이곳은 규동을 먹기 좋은 곳 중 하나입니다. 평범한 맛이지만 가격이 적당하고 혼자 먹기 참 좋은 곳입니다. 저 규동 하나에 아사히 맥주 한 병을 야무지게 뚝딱 해치우고 이제 나리타 공항으로 향합니다.
돌아가는 나리타 공항에서는 꽤 당황스러웠습니다. 출국 시간을 혼동하여 한 시간이나 일찍 갔는데, 심지어 비행기가 연장되어 1시간 늦게 타버리는 바람에 마음 불편하게 수첩에 업무를 써 내려간 기억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남은 동전으로 생맥주와 일본 위스키 (위스키를 공항에서 언더락으로 판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를 마시면서 시간을 죽였습니다. 그래도 혼자 생각할 시간은 많아서 좋았습니다.
이번 도쿄 여행은 예전처럼 쇼핑 목록을 채우는 여행이 아니었습니다. 제 안의 취향을 정리하고, 제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의 방향을 확인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패션, 일, 그리고 인생 — 그 모든 축이 다시 하나로 모이는 느낌이었습니다. 일에 지치고 마음이 소모되어가던 시기에, 도쿄는 제게 다시 ‘호흡’을 선물했습니다.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즐기고, 아무런 계산 없이 하루를 보낼 수 있었던 그 며칠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휴가였다고 생각합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창밖의 하늘을 보며 다짐했습니다.
“이제는 내가 원하는 것을 직접 만들어야겠다.”
그 다짐이 올해 남은 세 달을 이끌어줄 가장 큰 원동력이 될 것 같습니다. 이번 여행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앞으로의 나를 준비시키는 시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