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의 아이콘으로 대한민국에서 살아남기-브런치에서 해 보렵니다.
10살의 아이는 제법 똑똑했습니다. 학교 대표로 시, 도 전국 대회의 상이란 상은 휩쓸었습니다. 어린이 동 x일보 글짓기 대회에서 대상도 타고, 수학, 과학 경시대회도 모두 만만했습니다. 매달 보는 시험은 언제나 올 백. 반장, 전교회장은 당연히 압도적인 결과로 당선되고, 선생님과 친구들의 사랑은 독차지했어요. 매주 열리는 아침 조회에서 상 타는 것이 평범한 일상이었고, 쉬는 시간마다 언니 오빠들이 ‘어머, 쟤 얼굴 좀 봐! 쟤가 이번에 1등 했다는 걔야?’라는 수군거림과 부러움을 받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치맛바람을 일으키는 엄마는 더 당당하게 학부모회장으로 명성을 드높였고, 논두렁이 있는 시골과는 어울리지 않은 단정한 치마와 하얀색 스타킹을 신겨 주면서 딸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제게도 그렇게 인생의 달콤했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또래보다 큰 키는 남들보다 일찍 시작한 생리 덕에 멈춰 버려서 155 CM의 작은 키로 세상을 높게 쳐다보면서 중년을 살고 있어요. 생일날이면 마당 가득 떡볶이, 바베큐 파티를 해 주던 조금 잘 살았던 중산층 집은 19세부터 아버지의 불명예 은퇴와 연이은 사업 실패로 끝없는 추락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대학 생활의 낭만인 MT도 할 수 없게, 매일 아침부터 자정까지 과외와 학원, 피아노 교습으로 생계를 벌어야 했습니다. 결혼을 했고, 친정집의 말도 안 되는 사기 사건으로 인해서 마음이 제대로 고장 나기 시작했습니다. 친정도 없고, 꿈도 사라진 것 같았던 나날이 10년이 넘게 흐르고 있습니다. 영어교육가라는 명색 좋은 타이틀은 있지만 딱히 성공을 한 것 같지도 않고 10년 전에 출판한 영어책은 어느덧 단종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50이 코 앞에 있는데, 10년 동안 스스로한테 벌을 내린 ‘이혼’이란 문제도 아직은 완벽한 해결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용서를 빌어야 하는 시댁 가족에게 아직 접근도 할 수가 없고, 사업은 하고 있지만 아직 월 몇 천 정도는 벌 만큼도 안 되고, 인스타그램을 하고 있지만 인플루언서도 아닙니다. 작가라는 어릴 적 꿈을 갖고 브런치에 글을 쓰고 소소한 대회에서 상을 타고는 있지만, 이 또한 딱히 ‘와!’ 할 만큼의 감탄사를 만들지도 못합니다.
네, 저는 실패의 아이콘입니다. 연이은 실패 속에서 10년을 보냈고 30년 가까운 영어교육가로 살면서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고 있지만 세상 속에서의 ‘성공’과는 상당히 멀리 와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노력, 열정, 꿈'이란 키워드의 힘을 알고 있어요. 상금이 크지 않은 작은 공모전에서 상을 받는 저를 보면서 가끔 자괴감이 들 때도 있습니다. ‘네가 글을 쓰는 이유가 돈 때문이야?’ 솔직히 ‘상금’이 탐나지 않는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브런치에서 진짜 글을 쓰는 이유는 ‘실패의 아이콘’으로 세상에서 당당해지고 싶기 때문이에요.
인스타그램도 늘 ‘떡상’과 ‘인플루언서’의 길만 있지 않고 매일 글을 써도 누군가는 브런치 메인에 올라가지도 못합니다. 저처럼 100여 명 남짓한 구독자만 있기도 하고요. 영어교육가로 살았지만 교육 사업은 이제 시작한 초보라서 사실 교사들 급여 정산도 버거운 것이 현실이고요. 무너진 가족 속에서 ‘이혼’을 딛고 ‘회복’의 싹이 자라고 있지만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이주 여성을 교육한다는 사업도 이제 시작이고요. 77년생의 저는 매일 매 순간 실패하고 있고, 오늘도 여전히 실패 중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과정이고 저만의 이야기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브런치에서라면 이런 ‘실패의 아이콘’이 넘쳐나는 ‘실패 공화국’이 만들어질 것 같습니다.
다들 잘해 보고, 멋들어지게 살고 싶지만 그 기준조차 넘기 힘든 것이 우리네 삶이잖아요? 그래서 ‘실패 좀 하면 어때? 이것도 지나가는 과정인데’라고 하면서 ‘실패를 잘했다고 칭찬해 주는 실패 공화국’을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10년 묵묵하게 소소한 글을 조금 대단하게 만들어 주고 있는 브런치에서요.
저는 브런치를 통해서 ‘실패 공화국의 1호’가 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