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친 몸을 이끌고 베르사유 궁전의 정문을 나서며, 마지막으로 석양을 받아 붉게 물들어가는 궁전을 배경으로 사진을 남기고 싶어졌다. 근처에 마침 같은 나라에서 온 것처럼 보이는 단체 관광객들이 있었는데, 그중 서로 사진을 찍어주느라 바쁜 할머니들 중 한 분에게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다가가 영어로 내 사진을 찍어줄 수 있는지를 물어봤다.
흔쾌히 찍어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얘기를 들은 할머니는 본인 나라 말로 큰 소리로 화를 내더니 내 손에 들려있던 카메라를 낚아챘다. 그러고는 카메라에 달려있는 액정화면을 거칠게 접었다 펴기를 반복하며 옆의 할머니에게 뭐라고 얘기를 하는데, 액정 화면을 펼치면 자기 모습을 촬영할 수 있는데 이걸 나한테 부탁하고 있다고 말하는 느낌이었다. 물론 그렇게 촬영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누군가 몇 걸음 떨어져서 찍어주는 게 훨씬 이쁘게 나와서 부탁했던 것이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비록 짜증은 냈지만 그래도 찍어주고 가겠지 하고 기대를 했었는데, 한참 동안 시끄럽게 떠들던 할머니는 나한테 도로 카메라를 넘기고 옆의 할머니와 함께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할머니가 화를 내는 동안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참고 있었는데 그렇게 가버리는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이 할머니는 자기와 같은 말을 쓰지 않는 검은 머리 동양인을 싫어하는 것 같았다.
모욕감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몸을 돌리는데 바로 옆에 있던 어떤 할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할아버지는 그 할머니가 하는 말을 다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민망해하는 표정으로 서 있는 할아버지에게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였는데, 할아버지가 먼저 나에게 손을 내밀며 자기가 찍어주겠다는 손짓을 했다. 할머니 때문에 언짢아졌던 마음에 다시 해가 비추기 시작했다. 잽싸게 목에 걸었던 카메라를 벗어 할아버지에게 드리자 할아버지가 사진을 한 장 찍어주시더니, 내가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영어로 "One more?"라고 물어봐 주셨다. 당연히 "Yes"라고 말씀을 드리고 한 장 더 찍은 후에 카메라를 돌려받았다. 말수가 적은 분 같았다. 은퇴를 하고 단체 관광을 오신 것처럼 보였는데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 떨어져 계신 걸 보니 일행 중에 아는 사람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감사했다. 할머니와 같은 말을 쓰는 사람들을 미워할 뻔했는데 이 할아버지가 내 마음을 다독여 주셨다. 역시 국적의 문제가 아니라 그 한 개인이 어떤 사람이냐의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