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형, 보라,, 축축한 새벽
신년 연휴에는 밤새 문을 닫지 않았던 술집 몇 군데와 간단한 조리 음식을 파는 가게 외에는 모두 문을 닫는다. 지나가는 이들은 약속을 남발하고 기분 좋은 술 냄새를 풍긴다. 그리고 공원에 모여 희망찬 다짐, 혹은 회한에 젖는다. 투박하게 '쉽니다' 적어놓은 문안에선 빛과 웃음이 흘러나온다. 누구도 방해할 수 없다는 듯이. 어둑한 길거리 곳곳에 행복의 철옹성이 세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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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또 내 생활이 얼마나 생명력 없는가를 느껴버렸다. 물론 고향에 내려가지 못한 탓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나에겐 생기가 없다. 무엇보다 타인과 공유하는 문제가 없다. 전봇대에 매단 현수막을 내리기 위해 서로를 살피며 아슬아슬 기계를 움직이는 일도, 외풍이 들지 않게 가림막을 어떻게 보수할지 논의하는 일도, 나는 전부 목적 없이 구경만 한다. 고민을 쥐어짜 내도 떠오르는 건 '어떤 새로운 카페에 가볼까'하는 것뿐이다. 이는 무료함인가 외로움인가. 뒤따르는 고통을 알면서도 무언가에 뛰어들고자 하는 무모함인가.(24.01.02. 과거형)
꿈이 기억나는 것은 잠기운이 남아있는 짧은 시간뿐이다. 벌써부터 여행기를 쓰는 것에 흥미가 떨어졌다는 말이다. 계획적인 글쓰기란 나에게 맞지 않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저 일이 너무 많은 걸지도. 계획 당시의 흥분감은 앞으로 몇 주간, 혹은 몇 달간의 자신을 통제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나를 고양시킨다. 실패한 계획들은 더는 내게 상처가 되지 않는다. 나는 그저 포기에 능숙해진다. 능숙해진다는 것은 익숙해진다는 것과 다른데, 포기에 능숙해진다는 것은 거짓말에 능숙해진다는 것과 비슷하다. 상황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하는 수준에서 벗어나, 죄책감도 없이 전략적으로 거짓말을 하게 된다. 나는 한때 내 이야기를 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꼈다. 그러나 지금은 보라, 이렇게 뻔뻔할 수가 없다.
하지만 언젠가 여행기는 완성될 것이다. 그 시간을 잊은 것과 무관하게 나에겐 쓸 이야기가 있으므로. 다시 보지 않을 사진을 공들여 찍는 정도의 가치는 있을 것이다. 먼 훗날 그 기억의 사후평가가 달라진다고 해도 기록이란 그 자체로 증거가 되므로. 특히 말로 하는 기록이란 빠져나갈 수 없는 증언이 되므로.
늦은 밤 문득 그날 아빠와 걷던 낯선 거리가 너무도 선명히 떠올라 등골이 서늘해졌다. 타는 듯 더운 거리였음에도.(24.01.04. 보라,)
청소하다 오래전 노트 펼쳤는데 내가 정말 좋아하는, 어쩌면 나의 창작의 근간이 되고 있을 문구를 다시 발견했다. 캐스린 흄의 <환상과 미메시스>에 인용된 구절로, 마르셸 슈나이더의 ‘La littérature fantastique en France (프랑스의 환상 문학)’이라는 글에 등장하는 구절이다.
환상은 공상 위에서, 때로는 광란 위에서, 그리고 항상 희망 위에서, 무엇보다도 구원의 희망 위에서 이루어진다. 우리는 제각기 구원받기를 원한다. 비단 다른 세계에서만이 아니라 지금 바로 이곳에서도 구원을 소망한다. 부적과 비법, 그리고 보이지 않는 힘에 의지함으로써 얻어지는 확신을 통해 우리는 구원을 꿈꾼다.
이를 적어놓았던 2017년의 ‘환상’은 분명 구원보다는 절망과 염세로 끝났던 것 같은데, 오히려 요즘 쓰는 글은 어떻게든 희망으로 끝맺게 된다. 희망의 모습은 제각각이지만 행복을 그린다는 점은 같다. 내가 특별히 긍정적인 사람이 되어서는 아니고, 그저 조금 안정을 찾은 것 같다. 그나저나 정말 기막힌 문장이다. 읽기만 해도 눈물이 날 것 같다.(24.01.19. 축축한 새벽)
*블로그에 적은 일기를 편집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