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탈자
나는 늘 누군가는 절망적이라고, 황폐하다고 말하는 상황에서 안도와 위안을 얻는다.
설사 시원찮은 이유를 대고서라도 설명할 수 있다면 그 세계는 낯익은 세계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돌연 환상과 빛을 박탈당한 세계에서 인간은 자신을 이방인으로 느낀다. 이 낯선 세계로의 유배에는 구원이 없다. 그에게는 잃어버린 고향의 추억도 약속된 땅의 희망도 다 빼앗기고 없기 때문이다. 인간과 그의 삶, 배우와 무대 장치의 절연(絶緣), 이것이 다름 아닌 부조리의 감정이다. (알베르 까뮈, <시지프 신화>, 민음사 중, p.19)
그러니까 이건 분명 부조리에 관한 고찰이다. 부조리를 느낀 인간이 얼마나 희망 없는 공허함을 느낄 수 있는가에 대한 고찰이다. 아픈 때의 나는 그 상실감에 몸서리치며 절벽 끝에 다다를 수도 있다. 그러나 아프지 않은 때의 나, 혹은 그저 어디서든 위안을 찾는 데에 능해진 나는 인용구의 첫 줄만 본다. '시원찮은 이유를 대고서라도 설명할 수 있다면 그 세계는 낯익은 세계다.' 대부분의 상황은 마음만 먹으면 어떠한 시원찮은 이유라도 갖다 댈 수 있다. 정말 실없고 시원찮은 이유라도 말이다. 그러니까 그건 '낯익은 세계', 내가 이해할 수 있고 또, 극복할 수 있는 세계다.
또 이런 것도 있다. 나의 고뇌와 몸부림과는 무관하게 세상은 돌아가고, 우주에서 본 지구의 모습은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는 말에 외로움, 공허함, 두려움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어찌 됐든 나는 이 지구의, 이 우주의 일부다. 지구에서 서서히 멀어지는 카메라를 상상했을 때 그 카메라가 얼마나 멀어지든 상관없이 나는 그 속에 있다. 셀 수 없이 많은, 나와 같은 사람들과 함께. 그리고 또 셀 수 없이 많은 별들과 함께. 그렇게 생각하면 나는 외롭지 않다.
이 땅의 역사에서 한 인간이 쓰러져 죽지 않았던 자리가 단 한 군데도 없다고 생각하면 나는 어디에서나 요람 안의 아기처럼 잠들 수 있다.
모든 장비를 구비한 사람에게 여행이라는 행위는 불필요하다.(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알레프>, '알레프' 중)(24.04.08. 오탈자)
*블로그에 적은 일기를 편집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