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말이 떨어졌나?, 시론?
할 말이 떨어진 건 아니다. 대학 시절 들었던 강연에서 나영석 PD가 그랬다. 아이디어는 떨어지지 않는다고. 누군가는 그저 ‘천재’의 자신감으로 봤을지 모르겠지만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말이다. 많이 소비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에겐 어떤 발상이 고갈되지 않는다. 자기 머리가 안 굴러간다면 같이 일하는 동료 머릿속에서라도 끄집어낼 수 있다. 이제 그걸 거르고 다듬어 실행하는 건 다른 이야기겠지만.
문장도 마찬가지다. 촘스키는 언어 능력을 가진 인간은 그 유한한 규칙에서 무한한 문장을 생성할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휘들과 문장 구조들을 무한한 방식으로 조합할 수 있다. 비합리적인 것으로 보이는 조합도 그럴싸하게 포장할 수 있다는 점이 인간의 두뇌가 신비로운 이유다. 작곡과도 비슷한 것 같다. 음악 역시 한정된 음만으로 무한한 조합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렇게 재료가 적은데, 아직도 (적어도 동시대인들에겐) 새로운 음악이 매일매일 쏟아져 나온다는 것이 놀랍다.
문장을 재미있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역시 예측 불가능함이다. ‘비합리적인 것으로 보이는 조합도 그럴싸하게 포장’한 바로 그것이 우리에게 쾌감을 불러일으킨다. 거기서 연설이 나오고 시가 나온다. 사람이 매번 시를 쓸 수는 없지만 상투적인 문장만 쓰지도 못하는 것이 인공지능과 인간의 차이점이다. 어떻게든 그 문장의 틈새를 벌리고 들어가 자신의 흔적을 남기겠다는 다짐.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계속 쓸 수 있지 않을까?(24.05.19. 할 말이 떨어졌나?)
욕망의 충족을 두려워하는 습성이 있다고 쓴 적 있다. 나는 절제와 회피와 방종을 구분하지 못하는데, 절제를 방종하고, 방종으로 회피하기 때문이다. 중독이 주로 그렇다. 원하지도 않는 비이성적인 행동을 욕망도 없이 반복한다. 휴식도 그렇다. 쉬어 마땅함에도 그것이 두려워 눈을 돌린다. 욕망하는 것을 얻으면 무언가 큰일이라도 난다고 생각하는 걸까? 지금의 문제가 생긴 이유는 어린 시절 전체이기도 하고, 문제 제기를 한 바로 이 순간이기도 하다.
시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서사를 알려주는 시와 그렇지 않은 시. 서사란 무엇인가? 살펴본 바 정리해 보면 연속적인 이야기를 서술한다는 것이다. 시인이 이야기를 순서대로 알려주든, 이리저리 섞어서 알려주든 서사를 알려주는 것에는 변화가 없다. 그렇지 않은 시는 다르다. 분절된 단어들이 자칫 비합리적으로 보이게 뒤섞여있다. 독자는 이러한 시를 읽으며 서사를 만들어낸다. 혹은 부분만 가져와 자신의 서사에 편입시킨다. 시론 같은 건 모르지만 후자의 시는 어떻게 쓰는 건지 모르겠다. 시인에게는 서사가 있지만 그것을 알지 못하도록 깨트린 것일지도. 시인에게도 서사가 없다면 안경 모서리에 언뜻 비친 다른 세계의 한 장면을 적은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시는 꿈과 가장 가까운 글이구나. 그래서 나처럼 변두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고도난시구나.(24.05.22. 시론?)
*블로그에 적은 일기를 편집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