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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ㅁㄱㅍㅇ Oct 27. 2024

2024년 9월

생각의 낭비



생각을 소중히 보관하기만 하는 건 좋지 않다. 생각을 낭비하는 것도 중요하다. 


어느 날의 산책이었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아 글자도 눈에 안 들어오고 더는 일을 못하겠다고 느낄 때쯤 산책에 나섰다. 자주 가는 코스였지만 점심시간이라 사람이 많았다. 같은 공공기관에서 나온, 비슷한 색의 상하의를 입고 음료를 마시며 걷는 사람들. 그들에겐 재미있는 구석이 있다. 너무 특색이 없는 나머지 개인이 가지고 있는 사소한 습관이 너무나 잘 보인다는 것이다.


한 남성이 있다. 짧은 머리에 안경, 남색 피케 티셔츠와 짙은 색 긴 바지. 특이하게 접었다 펼 수 있는 부채를 들고 있다. 커피는 마시지 않고, 대신 강변 산책을 택했다. 홀로 걷는 사람은 외로워 보이기도 하고, 고집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남자는 후자였다. 오른쪽 발을 디딜 때 발 안쪽이 안으로 말려들어간다. 나는 이 증상을 알고 있다. 내가 겪었기 때문이다. 남자는 아마 오른다리를 왼다리 위에 얹는 식으로 다리를 꼬고 앉는 습관이 있을 것이다. 직장 생활 내내, 혹은 학창 시절부터 이어져 온 그 습관은 아무도 모르는 새 남자의 걷는 습관을 바꾸었고, 그렇게 남자는 후천적 평발이 된지도 모른 채 골반 통증에 시달리고, 운동화를 여러 번 바꾸었으며, 가장 쉬운 해결책으로 산책을 선택했을 것이다.


이는 아주 주관적인 분석이며 생각의 낭비다. 나는 영원히 그 남자가 누군지 모를 것이며 심지어는 얼굴도 모르고 눈썰미가 부족해 키도 가늠할 수 없다. 내게 영영 뒷모습으로 남을 그 남자는 내 상상 속 어느 고집 센 비대칭 인간으로 기억될 것이다. 산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그보다 상쾌할 수 없었다. 생각의 낭비 덕분이다. 생각을 비울 수 없다면 마음껏 낭비해 보라.(24.09.18. 생각의 낭비)



*블로그에 적은 일기를 편집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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