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관 집 큰 딸내미

왁자지껄 웃음소리의 공간

by 박희수

어릴 적 아버지는 동네에서 작은 사진관을 하셨다. 덕분에 나는 동네에서 ‘사진관 집 딸내미’로 통했다. 그 당시 내 또래 친구들은 부모님 가게 이름을 본 따 미용실 집 아들, 치킨 집 막내공주, 문방구 집 아들 등으로 불리곤 했다. 엄마를 따라 시장에 갈 때면 시장 이모들이 ‘아름 사진관 큰 딸내미 왔네’하며 손에 간식을 쥐어주던 그런 시절이었다.


방 두 칸, 거실 겸 부엌 하나, 화장실 한 개. 작은 살림집이 딸린 사진관은 우리 다섯 식구의 따뜻한 보금자리였다. ‘삐비비빅~’ 경쾌한 음악과 함께 사진관 가게 문이 열리면, 엄마는 대충 슬리퍼를 구겨 신고 손님을 맞으러 가게로 나갔다. 주로 손님들이 찍어온 필름 사진을 현상해 주는 일을 했는데, ‘증명사진, 돌 사진, 가족사진’ 사진이라면 모두 찍었다.


요즘이야 ‘아날로그 필름 카메라’는 보기 드문 귀한 물건이 되었다지만 그 당시 필름 카메라가 누가 뭐래도 대세였다. 가끔 나는 부모님을 도와 대신 사진관을 찾은 손님을 받았다.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접수 봉투 위에 이름과 접수날짜까지 야무지게 쓰고, 건네어받은 필름을 봉투 속에 넣어 사진 인화 대기 상자로 분류했다. 일주일 뒤에 찾으러 오라는 안내도 있지 않았다.


나에겐 ‘사진관’은 놀이터였다. 딸 부잣집의 첫째 딸로 태어난 나는 2살 8살 터울의 동생들을 호령하며 틈만 나면 가게를 신나게 뛰어다녔다. 알싸한 알코올 향 가득 찬 필름 현상실부터 버튼을 누르면 색이 ‘휙휙’ 바뀌는 전동 사진 배경지 기계, 단 7분이면 사진으로 현상해 주는 즉석 사진기까지. 가게 곳곳에는 신기한 것 천지였다. 아버지의 살림 밑천이자, 보물들이었던 카메라와 각종 기계를 요리조리 만지작거리며 놀았다.


만화영화 ‘세일러문’, ‘웨딩피치’, ‘천사 소녀 네티’를 따라 하며, 주제곡을 입에 달고 살던 어느 날이었다. 수상하게 생긴 커다란 상자들이 가게 안으로 끊임없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상자 안엔 또 다른 작은 상자가 들어 있었다. ‘이게 뭐지?’ 어리둥절하던 그 사이, 사진관 앞 작은 마당에는 커다란 기계 2대까지 놓였다.


‘커피믹스 자판기’와 ‘비디오 반납기’


아버지는 단순한 ‘사진관’에서 ‘비디오 대여’도 하는 사진관으로 사업을 확장하셨다. 신나는 일의 연속이었다. 방송 시간에 맞춰 봐야 했던 만화영화를 이제 내 마음대로 언제든 꺼내 볼 수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밤새 반납함으로 쌓인 비디오테이프를 수거하는 건 나의 일이었다. 금고에서 동전 몇 개를 꺼내 자판기에 넣고 달달 한 우유를 뽑아먹는 재미도 쏠쏠했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이 되던 해. 엄마는 나를 앉혀 놓고, 근심 어린 표정으로 큰일이 났다고 했다. 그 당시 뉴스에서 제일 많이 들었던 말이 ‘구조조정’이었다. 그 당시 얼마나 큰일인지는 몰랐지만, 소중했던 만화영화 비디오테이프들이 다시 상자에 담겨 가게 밖으로 나갔다. 아껴보던 ‘웨딩피치’ 비디오테이프 몇 개를 방 안에 숨겨놨다가 결국 엉엉 울며, 엄마에게 뺏겼던 기억이 난다.


그 후, 모든 것이 급격하게 달라졌다. 아버지는 사진관을 청산하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영상 촬영일을 하셨다. 나도 고학년이 되자 만화영화나 동생들과 노는 것보다 또래 친구들과 노는 게 더 재미있어졌다. 더 이상 동생들과 서로 경쟁하듯 벽에 등을 대고 키를 재거나, 밤새 만화영화를 돌려보지 않지 않게 되었다.


그 무렵 걸으면서도 통화를 할 수 있는 전화기가 등장했다. 그리고 ‘연아 폰, 효리의 가로세로 폰’ 등의 이름을 달고 해마다 변신에 변신을 거듭해 갔다. 급기야 핸드폰 하나로 시장도 보고, 영화도, 웹 서핑도 할 수 있는 ‘스마트 폰’이 나타났다.


이제 비디오 가게도, 사진관도 모두 그때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추억의 단어가 되었지만, 유년 시절 동생들과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게 해 주었던 곳이었던 작은 ‘사진관’ 여전히 내 마음속에, 우리 가족의 왁자지껄 웃음소리 나는 공간으로 아직도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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