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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사람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기

'싫으면 싫다'라고 말할 용기

by 민선미

나는 내 이름이 싫었다. '선미(善美)', 착하고 아름답다는 뜻의 이름. 사람은 이름대로 산다고, 그렇게 살아지는 거 같아서다.

"착해서 문제야."

이 말은 오랫동안 나를 묘사하는 수식어였다. 듣는 순간은 왠지 모르게 괜찮은 말 같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속에 묘한 무게가 느껴졌다. 착하다는 건 좋지만, 늘 참는 쪽이 된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첫아이가 유치원에 입학했을 때였다. 낯선 학부모들 사이에서 나를 유독 눈여겨보던 한 선생님이 말했다.

"어머님, 성실해 보이세요. 학부모위원으로 같이 해주실래요?"

그때 나는 한참 신입 부모로서 잘하고 싶던 때였다. '나 아니면 누가 하지' 하는 마음도 있었고, "싫어요" 한마디가 왠지 예의 없어 보일까 봐 선뜻 거절하지 못했다.

그렇게 시작된 학부모위원 생활은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했다.

회의 일정에 맞춰 시간을 쪼개고, 행사 때마다 아이 간식과 선물을 챙기며 뛰어다녔다. 그런데 돌아오는 건 감사의 말보다 수군거림이었다.

"저 엄마는 왜 저렇게 앞에 나서?"
"감투 쓰는 거 좋아하나 봐."

그 말이 내 마음에 오래 박혔다. 처음엔 아이를 위해서 시작한 일이었는데, 나중에는 괜히 잘 보이려 한다는 오해를 받을까 봐 위축됐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을 뿐인데, 어느새 '보여지는 좋은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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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에 올라가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2년 넘게 대표를 맡으며 끊임없는 시선을 견뎌야 했다. 무슨 일이든 앞에 서면 말을 듣고, 뒤로 빠지면 무책임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 사이에서 나는 늘 균형을 잃곤 했다.

결국 '좋은 사람'으로 보이려 애쓰는 동안, 정작 '진짜 나'는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그때 문득 공자의 말이 떠올랐다.

"군자는 화이부동(和而不同)하고, 소인은 동이불화(同而不和)한다."

참된 사람은 조화를 이루되, 무리해서 같아지려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나는 늘 '동이불화'의 삶을 살고 있었던 셈이다. 남과 다르면 불편할까 봐, 다 맞춰주며 웃는 척을 했다. 하지만 그건 조화가 아니라, 자기부정이었다. 좋은 사람 콤플렉스는 어쩌면 "싫다"라는 말을 미안해하는 데서 시작된다. 누군가의 부탁을 거절하는 순간, 내가 이기적인 사람으로 보일까 두려워서였다. 그러나 관계의 진짜 온도는 "싫으면 싫다"를 말할 수 있을 만큼 안전한가에 달려 있다.


이제야 깨달았다. 좋은 사람은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었다. 누군가의 시선에 갇혀 웃는 대신, 내 마음의 평화를 지키는 선택을 할 때 비로소 진짜 '좋은 사람'이 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내게 묻는다.

"나는 지금, 진심으로 '좋아서' 그러는 걸까? 아니면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서 그러는 걸까?"

그 질문에 솔직해지는 순간, 나는 비로소 '선미'라는 내 이름과 화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착하고 아름다운 사람이 아니라, 나답게 사는 사람으로.


칼릴 지브란의 말처럼, 타인의 기대에 맞춰 살다 보면 결국 아무도 아닌 사람이 된다. 이제 나는 '누군가'가 아닌, '나'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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