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술서를 쓰는 마음
살면서 굳이 마주치지 않았으면 하는 두 곳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병원과 경찰서일 것이다. 기쁨이나 편안함이 아닌, 삶의 고통과 문제의 한복판에서만 찾게 되는 그곳들. 오늘, 나는 후자를 찾아야 했다.
일주일을 ‘택배 분실’이라는 어이없는 문제로 끙끙 앓았다. 처음 있는 일이라는 택배기사를 10년 넘게 봐왔기에 철석같이 믿었다. 기사님은 자신이 오배송을 했을 수도 있으니 기다려달라고 해서 3일을 기다렸다. 그렇게 택배기사와 수차례 실랑이를 벌여도 책임은 공중으로 흩어졌고, 결국 택배기사님의 "경찰에 신고하세요"라는 무책임한 통보만이 남았다. 112를 거쳐 근처 지구대를 찾았다.
경찰서는 여전히 껄끄럽고 긴장되는 공간이다. 안내하는 대로 진술서를 작성하는데, '피의자(용의자)'를 적는 칸에 경찰관님이 "전혀 모름이라고 쓰세요"라고 알려주셨다. 그 순간, 순간적으로 덜컥 겁이 났다.
나는 늘 우리 동네는 CCTV가 많아서 안전하다고 막연하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흔한 절도 사건의 가해자를 '전혀 모름'으로 처리해야 한다는 사실을 마주하니, 단순한 물건 분실이 아니라 누군가 나의 현관 앞을 노리고 있었다는 생각에 소름이 돋고 무서움이 밀려왔다.
안내하는 대로 진술서를 작성하고 여러 곳에 서명하는 동안,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데 이곳의 업무 처리는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구식으로 느껴졌다. 묘한 답답함이었다.
그때, 경찰관님에게서 의외의 질문을 들었다. “요즘 흔한 택배 도난 사건이 이렇게 많은데, 전혀 모르셨어요?”
나는 정말 몰랐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아파트 무인 택배함을 이용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무용지물처럼 느껴졌다. 단지 현관 앞에서 편하게 물건을 받아보는 그 편리함에 길들여졌을 뿐이었다. 기사님들의 수고로움을 덜어드리는 것이라 막연히 생각했던 것은 어쩌면 내가 누릴 편리함을 위한 자기 합리화였는지도 모르겠다.
내 일이 아니기에 관심 갖지 않았던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기분이었다. 흔한 범죄가 되어버린 이웃의 택배 도난에 나는 눈을 감고 있었다. 경찰관님의 질문 앞에서 나는 피해자인 동시에, 무관심했던 방관자였음을 인정하며 뜨끔했다.
사건 접수는 되었지만, 결과를 듣기까지는 2주가 걸린다고 했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으니 기다리라는 말에, 이 흔하디 흔한 택배 분실 하나에도 이렇게 복잡하고 긴 행정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현실이 맥을 빠지게 했다.
집으로 돌아와 컴퓨터를 켜고 검색한 '택배 분실' 피해 사례는 너무나 많았다. 나는 우리가 서로를 믿고 사는 나라라고 막연히 믿어왔던 것 같다. 이제 그 막연한 믿음은 깨졌다. 번거롭더라도 다시 무인 택배함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거나, 안전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겠다고 절실히 다짐한다.
결국, 오늘 경찰서 방문은 나의 안일함과 사회적 무관심에 대한 경고음이었다.
편리함이라는 달콤한 덫에 걸려,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던 안전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깨닫게 해 준 씁쓸하고 서늘한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