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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곶감

아버지의 선물

by 민선미

아버지는 평생을 농사로 살아오셨다.
이제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시면서, 흙 묻은 바지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다시 밭으로 향하신다.
“풀 나는 걸 어떻게 보고만 있냐.”
아버지의 그 말엔, 지치지 않는 의지보다 익숙한 삶에 대한 고집이 담겨 있다. 

사실 그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다.
하지만 손바닥만 한 텃밭을 일구기에도 버거운 몸으로 깨, 배추, 콩, 마늘까지 농사를 지으시고는
수확했다고 전화 돌리는 모습을 보면 고맙기보다 먼저 마음이 아릿해진다. 


시골집은 아버지가 한자리에서 60년 넘게 살아온 곳이다. 내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고 아버지가 직접 설계하고 신축한 집이지만, 세월이 깃들어 낡은 양옥집이다. 집 옆에는 감나무, 대추나무, 밤나무, 모과나무, 앵두나무 등등 없는 것이 없었고, 그 나무들은 우리 사 남매의 겨울 양식이었다. 어릴 땐 감이 한 종류인 줄만 알았다.

그러다 단감이 있다는 걸 알았고, 충청도에서는 아직도 감을 “울궈서” 먹는다고 말한다.
며칠 전 엄마들과 커피타임서 “임신했을 때 울궈낸 감이 그렇게 먹고 싶었다”라고 말했다가 다들 처음 듣는 말이라며 어리둥절해했다. 그 순간 웃음이 나왔다.
아, 나는 시골에서 자란 사람이었지. 


얼마 전 시골에 갔을 때, 하우스처럼 촘촘한 망으로 덮인 곶감 건조장을 보았다. 손수 지으신 모양이었다. 그 순간 의문이 들었다.


“아버지… 이 많은 감을 누가 땄어요?”

아버지는 태연하게 말했다.

“내가 땄지.” 

나는 순간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다 넘어지면 어떡하려고요? 어쩐지 아무리 전화해도 핸드폰은 늘 집에 두고 다니시면서….” 

그런데 아버지는 웃기만 하셨다.


곶감 건조장을 넌지시 바라보시며

“그래도 저렇게 깎아놓고 걸어두니,

마음이 편해.”

나는 물었다.
“근데 아버지… 곶감 안 좋아하시잖아요.

왜 이렇게까지 만들어요?”

아버지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거의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희 엄마 먹으라고.”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엄마는 몇 년 전 허리 큰 수술 후 한동안 대소변을 받아내야 했고, 지금도 가끔 실수를 하셨다. 그래서 아버지는 곶감이 실수를 줄이는데 도움이 된다고 들었기에 믿으시는 눈치다.

아픈 사람보다 간병해 주는 사람이 더 병이 빨리 난다고 아버지는 늘 그랬다.

그래도 엄마는 아버지는 극진한 간병으로 몇 년 전부터 요양보호사가 방문하다가 몸이 좋아져서 주간보호센터에 다니기 시작하셨다. 그 후로 아버지가 수월해진 것처럼 보였다. 평일에 친정에 갈 때면 엄마는 늘 집에 안 계셨다. 예전에 아프지 않고 온전할 때의 엄마는 참 다정하고 걱정이 많은 엄마였다. 이상하게도 노환과 병환은 사람을 달라지게 한다고 지금은 어린아이처럼 걱정도 없고 평안해 보인다. 내가 통원치료로 아버지를 모시러 가거나 반찬을 해서 집에 가면 텔레비전과 씨름하고 있는 아버지와 강아지 두 마리만 나를 반긴다. 넓은 집에서 하루 종일 혼자서 얼마나 쓸쓸하실까. 


나는 한때 아버지를 원망하고 미워했다.

고집스럽고 무뚝뚝하고, 표현 한 번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아버지는 그때와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여전히 사랑하고 있었다.
방법은 서툴지만, 한결같았다.





감 한 알.
그 작은 과육에는 아버지의 사과, 후회, 미안함, 그리고 남은 세월을 향한 책임이 담겨 있었다. 

나는 그 곶감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사람이 늙는다는 건, 몸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모양이 바뀌는 일인지도 모른다. 

예전에는 그냥 농부였던 아버지가 지금은 참 잘 살아낸 사람처럼 보인다. 그 세월을 곁에서 지켜보니 이해보다 연민이 먼저 찾아온다. 


나는 아버지에게 늘 잔소리처럼 당부한다.

“집 밖에 나갈 때 모자 쓰시고, 목도리 하고 나가셔요.” 절대 하지 말라고 해도 분명하실 테니까 걱정하는 마음에서다.


가만히 곶감 줄에 매달린 감을 바라보며

문득 든 생각이다. 

사랑은 꼭 먹고 싶은 사람을 위해

자신은 먹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의 곶감을 보고

비로소 하나의 문장을 마음속에 적는다. 


“아버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아요.”

당신이 평생 표현하지 못했던 그 말들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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