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자신에게 진실하라.
어찌 스스로는 진실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이 진실하기를 바라는가.
만약 당신이 진실하다면 밤이 낮을 따르듯
어떠한 사람도 당신에게 거짓말하지 않으리라"
_셰익스피어 <햄릿>
이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 먼저 움찔거렸다.
이번 주 <새온독> 독서모임에서《죄와 벌》을 읽고 있어서 그런지 '진실'이라는 말이 더 깊이 와닿았다.
인간의 본성에는 선과 악이 복합적으로 공존한다는 것, 화가 나면 무심코 누구나 악한 말을 내뱉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요한 건 그것을 절제하는가, 아니면 그대로 행하는가의 차이가 아닐까라고 결론을 지었다.
자신에게 진실하다는 것은 내 안의 모든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게 아니라, 내가 진짜 원하는 것과 타인을 위해 억지로 맞추고 있는 것을 구분할 수 있는 정직함이라 생각했다.
앞 문장을 곱씹으며 나는 누군가에게 예의를 지키고, 배려하고, 좋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늘 나를 희생하며 살아왔던 시간들을 떠올렸다.
나는 내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용서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자만이었다. 왜냐면 똑같은 상황이 닥치면 아무렇지도 않아야 하는데 나도 모르게 흥분했고, 식은땀을 흘렸다. 그 후로는 감히 '용서했다'라는 말을 아끼기 시작하며, 대신 앞으로 절대 '남에게 상처 주지 않는 사람'으로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였는지 부탁을 받으면 '거절'하는 것이 어려웠다. 설상가상으로 문제는 문제를 낳는다고 이미 내 일만으로도 버거운 와중에도 주변의 시선과 평가가 먼저 떠올라서 그 앞에서 나는 망설임 없이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제가 할게요."
정작 그 말을 듣고 가벼워진 건 상대였고, 무거워진 건 나였다. 그 무게가 쌓이고 쌓여 어느 순간 나는 나를 잃어버리고 있었다.
"나는 왜 항상 나를 가장 나중에 두는가."
우선순위의 문제였다. 내가 우선이 아닌 다른 사람의 필요를 먼저 신경 쓰느라 내가 원하는 것을 포기하면서 자랐던 거다. 어느 늦은 밤, 억지로 맡은 일을 처리하며 잠든 집안의 기척만 듣던 시간이었다. 모니터 불빛 속에서 멈춰진 나의 손을 바라보며 나는 내게 조용히 물었다.
"넌 언제까지 이대로 살래? 정말 이게 내가 원하는 선택이었니?"
나 자신에게 묻는 객관적인 질문이었지만 불편하고 더는 외면할 수 없었다.
몇 년 전 기시미 이치로, 고가 후미타케의《미움받을 용기》책을 읽으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다른 책과는 조금 다른 구성방식이었지만 펼치자마자 느꼈다. 이건 가볍게 읽고 덮을 책이 아니라 내 삶의 방식과 내가 쌓아 올린 기준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질문이었다.
내가 나를 위해 내 인생을 살지 않으면,
대체 누가 나를 위해 살아준단 말인가?
_유대인의 교리
아들러의 심리학에서는 타인에게 인정받기 원하는 마음을 부정한다. 타인에게 인정을 받으면 확실히 기분도 좋아지고 나의 가치가 올라가는 거 같아 열등감은 사라지고 자신감이 생기게 된다. 남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산다면 타인의 기대에 따라 살아가느라 진정한 자신을 버리고 타인의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사는 삶이 과연 나를 위한 삶일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면 끝없는 비교와 불안으로 제대로 된 선택도 불가능하다. 최소한 남보다 나아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히고 사회적 기준에 어긋나는 것을 두려워해서 웅크린 채 살게 된다. 이런 나 자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변화가 시작되었다. 그 후로 상대방이 부탁을 하면 일단 일정을 살펴보고 답변을 주겠다고 하면서 시간을 번다. 그리고 잠시 숨을 들이쉬고 말했다.
"이번엔 어렵겠어요."
이 말을 내뱉는 순간 심장은 상대가 눈치챌 정도로 빨리 뛰고 손끝이 떨렸다. 하지만 놀랍게도 세상은 무너지지 않았다. 상대도 크게 실망하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다. 휴우~ 그제야 알았다.
내가 두려워했던 건 거절 그 자체가 아니라, 거절해도 괜찮은 나를 한 번도 허락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요즘 MZ세대를 보면 나보다 훨씬 자연스럽게 "나는 이게 좋아요.", "그건 싫어요."라고 쉽게 말한다.
그런 모습을 보면 솔직히 조금 부럽다. 우수개소리로 '부러우면 지는 거야'라지만 앞으로는 그렇게 당차게 살고 싶다. 그동안은 "남들이 뭐라고 볼까" "어른들이 칭찬하는 방식으로 살아야 해"라는 기준으로 자랐다. 그래서인지 그들의 솔직함과 경계 설정이 처음엔 낯설었지만, 이제는 한 가지 안도감을 준다.
"아, 적어도 이 아이들은 우리가 겪었던 방식의 침묵과 희생을 굳이 반복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그리고 문득 깨닫는다.
내 자녀에게 "나 자신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싫은 건 싫다고 말해도 괜찮다"라고 가르치고 있는 나 역시 이미 변화의 흐름 속에 들어와 있다는 걸 의식했다.
어쩌면 아이를 가르치며 나는 다시 나를 배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의 나는 모두에게 맞춰 사는 대신 내가 머물고 싶은 관계, 나를 소진시키지 않는 관계 속에 머문다.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라는 성어인 과유불급만 봐도 그렇다.
이제 나는 넘치게 주는 대신 필요한 만큼 나누고, 나를 잃지 않는 적당한 거리를 두어야 한다.
그리고 여전히 나에게 조용히 묻는다.
"이 선택은 나를 지키는가."
"나는 지금 내 삶의 중심에 서 있는가."
그 질문 앞에서 흔들림 없이 서고 있는 지금, 나는 비로소 안다.
건강한 관계는 '희생'이 아니라 '서로가 자기 자신을 잃지 않을 거리'에서 시작된다.
이것이 내가 이제야 배우고 있는 가장 늦었지만 가장 소중한 기술, 나를 지키는 선긋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