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로 돌아가는 시간
혼자만의 시간이 편하지 않을 때가 있다.
혼자 앉아 있는 내 모습을 문득 바라보게 될 때가 있다. 창밖으로 빛이 스며들고, 방 안은 고요하고, 아무도 나를 부르지 않는 시간. 예전엔 이런 시간이 얼마나 귀했는지 모른다. 잠깐의 여유만 있어도 그 안에 하고 싶은 것을 꽉 채워 넣었고, 그 시간만 있다면 뭐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막상 시간이 생기니 이상하게 마음이 편하지 않다. 고요한데, 그 고요가 한편으론 나를 불편하게 한다. 왜일까.
인생의 전반전이 끝나간다는 신호 때문일까. 아니면 이제야 비로소 '나'라는 사람과 마주 앉게 되어 그런 걸까. 혼자 있는 게 좋으면서도, 가끔은 이 고요가 두렵다.
아마 나만 그런 건 아닐 것이다. 나와 비슷한 나이의 사람들도 문득 이런 마음을 느끼지 않을까. 말은 안 하지만, 어쩌면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비슷한 순간을 지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20대의 나는 사람들 속에서 빛났다. 친구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좋았고, 밤새 떠들고 웃고, 함께 있다는 이유만으로 하루가 꽉 찼고 모자랐다. 혼자 남으면 오히려 어색했고, 뭔가 놓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30대에 들어서는 관계가 자연스럽게 정리되었고 혼자 있는 시간이 조금씩 늘어났다. 그 시간은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준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시기에는 혼자라는 말 자체가 사치가 되었다. 누군가 늘 나를 찾았고, 나는 늘 누군가의 필요를 먼저 살펴야 했다.
그리고 40대. 나에게 다시 시간이 돌아온 시기였다.
그때의 나는 정말 열심이었다. 스스로를 위해 새벽 시간을 떼어놓고, 그 시간에 몰입했다. 조용한 새벽 공기 속에서 책장을 넘기던 순간들, 글을 쓰며 마음이 단단해지던 날들이었다. 그 시간은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았던 코로나19라는 거대한 파도도 견디게 해주었다.
돌이켜보면, 남긴 것도 많았다. 매일 읽고 들은 지식, 습관, 자신감, 나를 다시 일으켰던 루틴들. 이것들이 지금의 나를 있게 했다. 하지만 잃은 것도 있었다. 가까이 있는 가족들을 편하다는 이유로, 이해해줄 거라는 핑계로 뒤로 미뤘던 시간들을 돌이킬 수 없었다. 좀 더 느리게 살아도 되었을 순간들인데 나는 너무 급했다.
온라인 세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남편의 말에 조금만 더 귀 기울일 시간도, 하루 몇 시간 가족과 나누는 쉼도 아껴가며 나 자신을 채우는 데 급급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시간들이 아쉽다. 스스로를 위해 쉼을 허락하지 못한 것만큼, 소중한 사람들에게 내어줄 여유를 갖지 못한 것도 한스럽다.
아이들이 자라고 온전히 나만의 시간이 생겼을 때, 처음엔 그저 좋기만 했다. 내가 온전히 쓸 수 있는 시간이 이렇게 큰 선물일 줄이야. 그러나 어느 순간, 이 여백이 조금은 무섭게 느껴졌다. 원하던 시간이었는데도, 이 고요가 나를 흔들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왜 이렇게 불안할까?'
어쩌면 나는 지금, 다시 나에게로 돌아가는 길목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장자는 사람이 결국 돌아가야 할 곳을 '귀기(歸己)'라고 했다. 본래의 나로 돌아가는 일. 억지로 꾸미지 않고 자연의 흐름대로 살아가는 삶이다. 지금의 이 낯섦은, 어쩌면 그 자리로 천천히 걸어가는 과정일지 모른다.
혼자 있는 시간이 꼭 편할 필요도 없고, 반드시 의미 있어야 할 이유도 없다. 그저 나라는 사람에게 돌아가기 위해 잠시 머무는 과정일 뿐이다.
오늘도 나는 조용히 내게 묻는다.
"지금 이 시간, 괜찮니?"
그러면 마음이 아주 작게 대답한다.
"응, 괜찮아질 거야. 천천히."
어쩌면 혼자만의 시간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건, 나를 잃는 일이 아니라 본래의 나에게 다시 돌아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 돌아감의 의미를 생각하다 보면 문득 천상병 시인의 귀이 떠오른다. "나 이제 돌아가리라." 이 세 소풍을 마치고 마침내 고요한 자리로 돌아가듯이.
결국 우리 모두는 어디론가 돌아가는 중이다. 장자가 말한 본래의 자리로, 천상병 시인이 그리워한 고요한 집으로. 그렇다면 혼자만의 시간에 익숙해지는 일도 그 귀한 여정의 일부일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도 오늘, 나처럼 혼자 있는 시간이 조금 낯설게 느껴질지 모른다. 그러다 어느 순간, 조용히 중얼거릴지도 모른다.
"나도 그래."
그 말이면 충분하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속도로 본래의 자리로 천천히 돌아가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