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어린 수아에게 보내는 편지

처음은 늘 완벽하지 않다

by 소담

“저는 제 속도로 살아가고 싶은데, 세상이 너무 빨리 흘러가니까 뒤처지는 것 같아서…, 불안해요.”

지난주 가족 독서토론에서 아이가 한 말이다.


그 순간 ‘자신의 속도로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속도에 뒤처지는 것 같아 불안했던 경험이 있었는지’ 등의 질문도 잊은 채 곧바로 대답을 해버렸다.

“너의 속도로 살아가도 돼. 오히려 네 속도를 지키는 게 경쟁력이 될 수 있어. 그 속도가 맞지 않다고 느껴지면, 그때 속도를 조절해도 늦지 않아.”


요즘은 아이뿐 아니라 많은 젊은 세대가 시대의 빠른 흐름 속에서 다시 ‘원조’와 ‘고전’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있다. 모두가 속도를 앞세울 때 자신만의 리듬을 잃지 않는 것이 오히려 차별점이자 경쟁력이 될 수 있다는 말을 아이에게 건네고 싶었다.


돌아보면, 나 역시 처음을 시작할 때는 늘 불안했다.

15년 전에 시작한 가족회의, 6년째 이어온 크리스마스 파티, 3년이라는 시간 동안 함께 떠나는 가족여행, 그리고 올해 시작한 가족독서토론까지. 어떤 것도 처음에는 결과를 알 수 없어 막막했고, 아이들이 어릴 때는 그 불안이 더 컸다.

하지만 ‘우리 가족만의 문화를 만들면 더 행복할 수 있겠다 ‘는 작은 신념 하나로 시작했고, 시간이 흐른 지금에야 알 수 있게 되었다.


처음의 불안은 결국 첫 발걸음을 내디딘 순간 사라졌고, 세월 속에서 더 단단한 초석으로 다져졌다.


누구에게나 처음은 낯설고, 가보지 않은 길은 당연히 두렵다.

그러나 그 두려움 때문에 한 발도 내딛지 않는다는 건, 삶이 덤으로 건네준 선물보따리를 열어보지도 않고 내다 버리는 일이다.


그날 토론회를 마친 후, 문득 어린 시절의 나에게 편지를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결실이 그때의 나에게 어떤 위로가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다.



- 어린 수아에게 보내는 편지-

(‘수아’는 나의 호다,

빼어날 수(秀) + 아름다운 여자 아(娥)

좀 과분한데,

‘살아온 삶이 빼어나게 아름답고 우아한 여자‘라는 의미를 담아 지어 주셨다.)


수아야, 너 참 잘했더라.

가족회의를 시작했을 때, ‘아이들이 어린데 뭘 알겠냐’는 핀잔도 있었지만,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힘내며 매주 수요일마다 가족회의를 꾸준히 이어간 건 정말 잘한 거야.


크리스마스 파티 때도 그랬잖아.

‘종교도 없으면서 굳이 예수 탄생일을 기념하냐’는 말을 듣고도, 너는 흔들리지 않았어. 그건 특정한 기념일을 위한 파티가 아니라, 가족이 함께 요리를 하고 맛있는 음식을 나눠 먹으며, 한 해를 돌아보고 서로의 꿈과 계획을 말하는 소중한 시간들로 가득 채웠으니까.


가족여행도 그랬지.

누구나 가는 여행이었지만, 너는 ‘한 명씩 가고 싶은 곳을 정한다’는 방식에 의미를 더했지. 장소를 정하면 그곳이 어디든 가족 모두가 함께 가서 즐기기로, 그리고 여행지에서는 그동안 미뤄둔 대화를 마음껏 나누는 문화, 그게 우리만의 여행이 되었어.


꾸준하게 이어온 덕분에 지금은 아이들이 스스로 가족독서토론을 제안할 만큼 성장했고, 아들의 여자친구, 딸의 남자친구, 그리고 그 친구의 친구까지 자연스레 모여 함께 책과 삶을 이야기하고 있어. 그들의 성장 과정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축복이야.


그때의 너는 지금의 이런 고상하고 우아한 성적표를 받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거야.

참 잘했어.


다시 인생을 살 기회가 생긴다면, 나는 네가 지나온 길을 따라 걸어올 거야.

조금 더 다듬어진 모습으로, 그러나 너와 같은 마음으로 말이야.


삶을 소중히 여기고 정성스럽게 대접해 준 너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


“고마워, 너 덕분에 오늘이 더욱 빛날 수 있었어.”


-어른 수아가 보냄-



나이가 들어간다는 건, 삶이 맛있게 익어간다는 것이다.

자신의 속도로 꾸준히 살아가는 사람은 좋은 열매를 맺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그 열매는 우리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달콤하고 근사할 것이다.


나는 오늘도 내 속도로 걷는다. 천천히, 그리고 가끔은 빠르게.

한 호흡, 한 호흡을 심부까지 가득 채우면서, 나를 더 단단하게 빚어 간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마음의 뒷면, 그리고 나의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