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인생에서 중요한 일들이 찾아오는 날들이 있다. 매년 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 갔다가도, 어느 해는 인생에서 겪어볼 수 없는 경험들을 하게 되는데, 그런 것들은 첫사랑과 데이트하는 날 키스하는 방법을 몰라 쩔쩔맸던 일일수도 있고, IMF 국가부도가 터져서 힘들게 직장을 구한일일 수도 있다. 어떤 일들은 동시에 같이 오는 해도 있었고, 또 몇 년은 그냥 그런 폄범한 일상이 반복되는 해도 많았다.
그런 면에서 1991년은 나에게 특별하다. 그해에 난 대학을 들어갔다. 나는 91학번이다.
이상한 건 처음 만난 누군가 91학번이라고 자기를 소개할 때면 난 마치 3인칭 대명사를 들을 때처럼 "와 저분은 늙었구나"라는 생각을 먼저 하게 된다. 그러니까 내가 91학번이라는 것과 다른 사람이 91학번이라고 하는 것에 공통점보다는 91학번이 갖는 즉 옛날 옛적을 먼저 생각하게 된다. 내가 신입생 이었을 때 80년대 학번을 만날 때면 선생님 대하듯 어른처럼 느껴졌던 것을 보면 학번이 갇는 위엄은 대단했다.
학번이 계급인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어떻지 모르겠지만 학번이 이름보다 더 중요한 시절에 난 대학을 다녔다. 나는 지금도 91학번이 그렇게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무려 34년 전 일이다.
강산이 세 번 바뀌고도 남는 시간이자, 한 사람이 성인이 되고도 남는 시간이다. 신입사원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학번을 물어보게 되는 경우가 가끔 있다. 어쩌다 신입사원들이 내 학번을 물어보는 경우도 있고, 내가 신입사원들의 학번을 물어보는 경우도 있다. 무엇을 확인하기 위해서 라기보다는 어쩌다 서태지 노래를 부른다던가 IMF 시절에 무엇을 했다던가 아버지가 91학번 이라든가 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서로 놀라며 다급히 물어본다.
" 이사님 91학번 이셨어요"
" 저희 아버지가 91학번 이세요 "
이럴 때면 삼인칭 대명사로만 들리던 91학번이 그렇게 입체적이고 구체적으로 느껴지게 된다.
그렇지 빨리 결혼해서 바로 애를 낳았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91학번은 대부분 72년생들이다.
재수나 삼수를 해서 91학번이 된 경우도 있지만 91년도는 1972년생들이 대학을 입학했던 해이다.
그해에는 미국과 이라크 간 걸프전쟁이 있었고, 소련 공산주의가 붕괴했고,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했고, 학력고사와 전기대, 후기대, 전문대가 있었고, X세대가 있었다.
그해 91학번이 되고 좋았던 건, 눈치 안 보고 술을 먹을 수 있었고, 습관처럼 담배를 피울 수 있었고, 시간이 없는 것처럼 놀 수 있었고, 미라니 뭐니 생각 같은 걸 안 해도 되었고, 누우면 천장 위로 빨간 공과 흰 공이 그려진 당구장이 보였고, 파전집과 맥주집으로 몰려다니며 비둘기밥을 주었고, 이제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구나 모든 것을 이룬 사람처럼 하루를 즐기며 살았다.
그렇다고 대학생활 전체를 저렇게 보냈다는 건 아니다. 아마도 그 시간은 어른이 되어가는 마지막 과정이었는지 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1991년은 분명 나에겐 많은 걸 가져다주었다. 난 세상 모든 것이 초록으로 물드는 오월이 되면, 스무 살의 젊음이 내뿜던 1991년이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