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울프 블라스 레드라벨 샤도네이
"와장창!"
긴 연휴를 앞둔 마트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큰 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봤는데 모두들 내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당혹스러운 마음에 주변을 둘러보니 카트 안에 앉아 있던 아이가 동그랗게 토끼 눈을 뜨고 있었다. 얼굴을 보아하니 뭔가 사고를 친 듯했다. 자신의 잘못을 직감적으로 깨닫고 짓는 표정이었다. 아이의 한 손은 카트 손잡이를 꽉 잡고 있었고, 다른 한 손은 허공에 멀리 뻗어진 채 멈춰 있었다. 그 아래에는 와인 한 병이 굴러다녔다.
"괜찮으세요?"
매장 끝에 서 있던 직원이 쏜살같이 우리 쪽으로 달려왔다.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된 나는 연신 죄송하다고 말하며 바닥에 떨어진 와인 병을 집어 들었다. 그런데 아뿔싸, 마개가 찌그러져 있었다. 이제 막 세상에 눈을 떠 호기심이 왕성한 아들을 탓할 수도 없고, 얌전히 잘 앉아 있다고 잠깐 눈을 뗀 내 잘못이 컸다. 마치 사려고 정해둔 것처럼 자연스럽게 카트에 넣으며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직원은 아이가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라며 당황한 나를 달래주었다. 배열이 흐트러진 와인들을 다시 정리하며 필요 없으시면 굳이 사지 않아도 된다는 말까지 했다.
"아니에요~ 저는 와인을 정말 좋아한답니다, 하하하."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살짝 가격표를 확인해 보았다. 그리 놀랍지 않은 숫자에 빨간 할인 딱지까지 붙어있었다. 심지어 내가 좋아하는 샤도네이라 몇 병 더 담았다. 재빠르지만 여유 있는 척 그 자리를 떠났다.
남편에게 오늘 일을 이야기하며 와인을 땄다. 잔소리를 한 대접 들어 먹어서 그런지 배가 불렀다. 시원한 소화제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서둘러 잔을 부딪치고 한 모금 홀짝 했다. 상큼한 향이 입 안에 퍼져 나갔다. 그 순간, 낮에 만났던 직원이 떠올랐다. 바쁜 와중에 일이 터져 짜증 났을 법도 한데 나와 아기를 먼저 생각해 주다니. 고마운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것 같아 미안했다. 내일이라도 인사를 하러 가면 계시려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한 병을 다 비워냈다.
다음날, 아이와 함께 마트에 있는 주류 코너에 다시 방문했다. 이번에는 아이 손을 꼭 붙잡고 주변을 서성였다. 익숙한 뒷모습이 볼펜을 들고 술 병을 세고 있었다. 어제 그분인가 싶어 수줍게 '저기요.'를 외쳤다. 나를 향해 돌아서는 얼굴은 안타깝게도 낯설었다. 무슨 일이시냐 묻는 직원에게 괜히 궁금하지도 않은 질문을 하고 익숙한 몇 병을 집어서 가게를 나왔다.
집으로 돌아와 구매한 와인을 꺼냈다. 평소 좋아해서 즐겨 먹는 것들이었지만, 오늘은 왠지 다른 걸 마시고 싶었다. 어제 그 와인. 부엌 한쪽에 남아있는 병들이 미처 돌려주지 못한 마음 같았다. 남편은 어쩔 수 없지 않냐고 다독였지만 기억에서 흐릿해지는 그분의 얼굴이 못내 아쉬웠다. 에잇, 술이나 마시자.
아들이 골라준 와인을 또다시 음미하며, 육아 중 경험했던 수많은 감사함을 떠올렸다. 이틀 연속으로 차가운 와인을 들이켰지만 속은 더없이 따뜻해졌던 그런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