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 오키나와 생맥주
키는 180cm에 몸무게는 8*kg이 나가는 친한 언니(!)가 있다. 그녀는 부모님께 물려받은 타고난 체격으로 초등학교 때부터 합기도 대회에서 상을 휩쓸었다. 부상으로 인해 선수의 세계에 발을 들이지는 못했지만 사회에서 축구, 줄다리기, 계주 같은 체육 행사가 있으면 언제나 이 언니가 속한 편이 이겼다. 같은 성별 내에서는 적수가 아예 없고, 팔씨름 같은 종목에서 체구가 작은 남자와 붙어 이긴 적도 있다.
그런데 언니는 의외로 여성스러운 성격을 지녔다. 집안일이 취미이고, 요리를 아주 잘하며 커다란 손을 가졌지만 리본을 잘 묶는다. 게다가 하나님을 믿는 조신한 여자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술을 입에 한 방울도 대지 않았다. 나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매번 술자리에서 콜라만 마시는 언니를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분명 술을 아주 잘 마실텐데, 잘 마실 수밖에 없는 신체를 타고났는데 그 능력을 썩히고 있다니. 정말 술을 먹고 싶지 않은 걸까 싶어 언니에게 솔직하게 물어봤다. 자신의 주량이 궁금하지 않냐고 조심스레 질문을 던져 보았다.
언니는 의외로 술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어렸을 때는 관심이 없었지만 나이를 먹으며 호기심이 생겼다고 했다. 그렇지만 이제 와서 주변에 술을 마시고 싶다는 티를 내기가 쉽지 않았다고. 누군가 이런 말을 꺼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계속해서 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러더니 취하는 게 어떤 느낌인지 궁금하다며 초롱한 두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스무 살도 아니고 마흔이 다 되어 이런 대화를 한다는 게 조금 놀라웠지만 궁금한 게 있으면 해결을 해야지, 나는 곧장 소주 한 병을 주문했다.
언니에게 소주잔을 건네주고 가득 따라주었다. 그분께는 죄송하지만 신념을 꺾은 날이라며 즐거운 표정으로 기념 촬영도 했다. 나는 '첫 잔은 원샷'이라는 진리를 전파하며 두 손을 살살 흔들고 얼른 마셔보라 권했다. 언니는 긴장된 표정으로 잔에 있던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목으로 꿀꺽 넘긴 뒤 한 마디를 내뱉었다. "너무 써!"
소주가 입에 맞지 않은 언니는 다시 금주를 선언했다. 그렇지만 몸에 들어간 알코올이 언니의 술 감각을 깨워주었다. 며칠이 지나고 나에게 전화를 걸어 소주 말고 다른 술은 없냐고 물었다. '없긴 왜 없어, 많지!' 그날 이후로 나에게는 특명이 떨어졌다. 그녀에게 맞는 술을 찾아라!
언니와 만날 때마다 각종 주류를 마시며 입맛에 딱 맞는 술을 접하게 해 주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마음에 쏙 드는 한 잔을 만나기란 쉽지 않았다. 너무 달다, 밍밍하다, 맛이 이상하다 등등 비난의 소리가 숱하게 쏟아졌다. 하지만 나는 사명을 받은 순교자처럼 포기하지 않았다. 전국을 다 돌아서라도 기필코 찾아내고 말 것이라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렇게 각지의 식당을 전전하기를 몇 달, 전라도 광주의 한 일식집에서 나는 해내고야 말았다. 찾았다, 오키나와 생맥주!
언니는 생맥주를 한 모금 호로록 마시더니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벌컥벌컥 순식간에 반잔을 비워내더니 "캬~"하는 소리를 냈다. 술꾼이라면 모두가 아는 그 소리, 청량한 탄산감을 만나면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그 소리가 언니의 입에서 나왔다. 역시나 바로 맛있다는 말이 튀어나왔다. 맛있다니, 맛있다니!! 우리는 배가 터질 정도로 맥주를 마시고 비틀거리며 식당에서 나왔다. 취해서 올라간 둘의 입꼬리는 좀처럼 내려오지 않았다.
이후 언니는 오키나와 생맥주에 집착을 하게 되었지만 안타깝게도 파는 곳이 많지 않았다. 한동안 언니와 나의 대화 주제는 어디에서 이 맥주를 파느냐였다. 오키나와라는 단어가 눈에 띄기만 하면 손잡고 달려가 안주가 나오기도 전에 한 잔씩 마셨다. 가격이 비싼 게 흠이지만 누군가의 인생 맥주를 찾아준 것에 대한 뿌듯함에 비하면 별 거 아니었다.
최근에 언니는 진짜 일본 오키나와에 가서 오키나와 생맥주를 마셔보고 싶다며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떠나기도 전에 비행기 값을 뽑으려면 몇 잔을 마셔야 하는지 계산하는 모습을 보니 주님이 참 기뻐하실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이번주 일요일에 만나기로 했으니 회개 기도라도 좀 하고 오라고 문자를 넣어놔야겠다. 아, 설마 나에게 사단아 물러가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