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대뜸 돈을 주겠다고 했다. 나는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다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재수 학원비를 한꺼번에 줄 테니 하고 싶은 일을 하라는 뜻이었다. 막 스무 살이 된 내게 천만 원은 어마어마하게 큰 숫자였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허공만 바라봤다. 아빠는 요즘 같은 시대에 고졸자로서 어떤 대접을 받을지도 함께 고려해서 잘 선택하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어떤 쪽이든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 크다는 걸 알기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조용히 방으로와 침대에 누웠다. 밤을 새워 생각해도 도전하고픈 일이 떠오르지 않았다. 무엇보다 시도할 용기가 없었다. 다음날, 아빠에게 대입 학원에 가겠노라 조심스레 답했다. 그때는 아빠의 사려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했다. 패배감에만 짓눌려 돈 안에 들어있는 위로와 격려를 알아채지 못했다.
입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일상에 지쳐 있던 와중에 아빠가 한 번 더 나를 불러 앉혔다. 공부는 잘되냐는 뻔한 말이 오갈 거라고 예상했는데 또 돈 이야기를 했다. 대학에 합격하면 백만 원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나마 손으로 헤아려지는 금액에 솔깃했다. 움츠러들었던 어깨가 활짝 펴지며 의지가 불끈 솟아올랐다. 알겠다고 대답한 뒤, 곧장 책상에 앉아 문제집을 펼쳤다.
드디어 대입 결과가 발표 나는 날이 왔다. 원서를 접수한 학교 홈페이지에 접속해서 떨리는 심정으로 수험 번호를 입력했다. 잠시 후 화면에 ‘합격’이라는 두 글자가 나타났다. 기쁨의 비명을 지르고 즉시 아빠에게 연락했다. 수화기 너머로 ‘축하한다, 역시 해냈구나.’라는 장황한 말 대신에 딱 한 마디가 들려왔다.
“용돈 보내 줄게.”
짧은 문장이었지만 아빠도 격양되어 있다는 게 느껴졌다. 전화를 끊고 재빨리 은행으로 달려갔다. 그새 내 통장에는 백만 원이 입금되어 있었다. 너무 신이 나서 창피한 줄도 모르고 소리 내서 웃었다. 친구들과 축하 모임을 연이어하고 눈 여겨둔 가방과 옷을 마음껏 샀다. 그걸로 아빠에게 작은 선물이라도 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아빠가 보낸 돈을 흥청망청 써버렸다. 당시에는 새내기가 된 나에게만 초점이 맞춰졌다.
대학 입학 후에도 아빠는 여전히 든든한 후원자였다. 그러다 신입생 놀이에 정신이 팔렸을 때 아빠가 갑작스레 암 선고받았다. 매일 입던 양복이 아니라 환자복 차림이 너무나도 낯설었다. 아빠는 울먹이는 나를 향해 오히려 괜찮을 거라며 미소를 지었다. 그 얼굴을 보니 어쩐지 안심이 되어 어린아이처럼 정말 별일 아닐 거라 믿었다. 이후 아빠의 몸은 계속해서 말라갔지만 나는 애써 눈을 돌렸다. 어떠한 일도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을 거라 여기며 다가오는 현실을 회피했다. 결국 아빠는 한 줌의 흙으로 남았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에도 사람들과 어울리고 시답지 않은 일을 쫓아다니느라 바빴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 묵직한 빚이 생겨났다는 게 느껴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무게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아빠의 진심을 너무 늦게 알아챈 탓이었다.
첫 월급을 받던 날, 은행에서 오만 원을 몇 장 뽑았다. 내가 좋아하는 노란색 봉투에 담고, 겉에는 반짝이는 분홍 하트 스티커를 붙였다. 부모님께 내복을 사드리는 게 하나의 풍습으로 자리를 잡았지만, 나는 돈으로 그간의 감사함을 표현하기로 했다. 혼자 옛 기억을 회상하며 아빠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무덤에는 연둣빛 싹이 돋아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봉긋한 산소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준비한 술을 잔에 따랐다. 그리고 옆에 두툼한 봉투를 두었다.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화려한 노란색은 유난히 눈부셨다. 자리에서 일어나 술을 뿌리고 작은 단지 안에 있는 아빠를 상상했다. 오늘만큼은 나와 꼭 닮은 미소를 짓고 있을 것 같았다. 날씨 탓인지 괜히 코끝이 시려 빠르게 짐을 정리했다. 마지막으로 봉투를 가방에 도로 넣는데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아빠가 건넨 용돈도 내가 주려던 봉투도 모두 내 손에만 들려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노란 봉투를 다시 꺼냈다. 아빠가 준 커다란 금액 속에 있는 진심을 놓쳐버린 지난날이 스쳐 갔다. 받은 용돈은 전부 써버렸고, 함께 담아 준 사랑은 갚을 길이 없었다. 한동안 멍하니 손에 쥔 봉투만 바라봤다. 되돌려줄 수 없다면 오래도록 간직하면 어떨까. 나는 분홍 스티커를 손가락으로 꾹 눌러 빛나는 봉투를 서랍 깊숙이 넣어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