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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채곱창과 소주 두 병

#정윤작가님 소설반 글쓰기 숙제 - 4 (감각을 자극하는 글쓰기)

by 빛나는

빨갛게 타오르던 해가 무악재 고개에 걸렸다. 아빠는 나와 맞잡았던 손을 잠시 빼고 가게 문을 열었다. 희뿌연 연기와 함께 고소한 들깨 향이 우리를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사장님은 힘을 실어 외치며 양손으로 뒤집개를 요란하게 움직였다. 흡사 꽹과리를 울리는 것처럼 경쾌한 음이 귓가에 퍼졌다. 달궈진 판 위에는 깔끔하게 손질된 곱창이 촉촉한 수분을 머금고 있었다. 그 옆에는 잘게 썰린 양배추와 깻잎이 자기 차례를 기다렸다. 나도 모르게 침이 꼴깍 넘어갔다.


아빠는 야채곱창 2인분과 소주 한 병을 주문했다. 잘 익은 청록색 풋고추와 반질반질한 양파 그리고 따끈한 어묵 국물이 나왔다. 작은 소주잔 두 개도 앞에 놓였다. 이제는 당당하게 소주를 딸 수 있게 된 나는 흥분된 손놀림으로 뚜껑을 돌렸다. 빈 술잔에 꿀렁하는 소리와 함께 투명한 액체가 담겼다. 빨간 두꺼비가 그려진 병을 내려놓고 아빠를 쳐다봤다. 분명히 할 말이 많아 보였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젓가락만 만지작거렸다.


“내일 학교에서 MT를 간다고?”

“응.”

짧게 대답한 뒤, 문 쪽을 바라봤다. 사장님의 구부정한 등이 보였다. 여전히 바쁘게 곱창과 야채를 볶는 중이었다. 달그락하는 분주한 손길이 입맛을 돋우었다. 내가 먹음직스럽게 익어가는 곱창볶음에 눈길을 주는 사이 아빠는 연거푸 두 잔을 마셨다. 나도 같이 홀짝이긴 했지만, 살짝 단내만 맡고 금세 잔을 멈췄다. 온 신경이 철판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맛있게 드세요.”

기름을 몇 번이나 두른 건지 윤기가 잘잘 흐르는 자태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젓가락으로 탱글탱글한 당면을 집어 허공에서 둘둘 몇 바퀴를 돌린 뒤 입에 한가득 넣었다. 곧바로 시원한 소주를 한 잔 들이켜는 일도 잊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술을 넘기는 내 모습을 보며 아빠는 기가 차다는 듯 웃었다. 별다른 말 없이 한 입과 한 잔을 번갈아 먹으니 이내 둘의 얼굴이 불그스름해졌다.


“그러니까, 남자는 말이지.”

아빠는 뒷말을 이어 나갈 것처럼 하더니 갑자기 술을 더 시켰다. 나는 발그레한 볼을 붙잡고 아빠와 잔을 부딪쳤다. 사장님은 우리가 앉은자리를 살피더니 음식이 식었다며 휴대용 가스레인지를 가져왔다. 불그죽죽했던 곱창은 다시 생기를 찾았다.


“남자는 마음이 좀 쉽게 변하고 그래.”

아빠는 약간 달아오른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그제야 아빠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것 같았다. 여자들만 있던 학교에서 남녀가 같이 다니는 대학에 들어간 큰 딸이 내심 걱정이 된 걸까. 농담처럼 가볍게 던진 말이었지만 사뭇 진지한 속내가 비쳤다. 나는 멀뚱하게 두 눈을 깜빡이고 못 알아듣는 척을 했다. 곱창에서 피어오르는 김 사이로 아빠의 얼굴이 붉게 번졌다. 지글지글 타오르는 소리와 함께 어설픈 부녀의 시간은 무르익어 갔다.


“또 오세요.”

우리는 볶음밥을 먹는 일도 잊은 채 가게를 나섰다. 밖으로 나오니 하늘 끝자락에 노을이 남아 있었다. 산 너머로 기울던 해가 하루가 아쉬워 뒤를 돌아보며 자주색을 흩뿌렸다. 아빠와 나는 조금씩 수그러드는 찬란한 기운을 붙잡으려 걸음을 재촉했다. 서로 앞다투어 가면서도 꼭 잡은 두 손은 놓지 않았다. 십여 년이 흘렀지만 그날의 모든 붉은빛은 내 마음에 아련하게 머물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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