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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無)의 의미

#정윤작가님 소설반 글쓰기 숙제 - 7 (도입부 다시 쓰기)

by 빛나는

[변경 전-1]

https://brunch.co.kr/@sohee290928/9


“소풍 가는 것처럼 맛있는 도시락을 싸 가자!”

요리에 별 관심이 없는 엄마가 매년 12월이 되면 습관처럼 하는 말이다. 한겨울에 소풍이라니, 심지어 이 추위에 밖에서 밥을 먹자는 말에 누가 꼬임을 당할까 싶지만 말투에서 묻어 나오는 미세한 긴장감에 나는 마지못한 척 준비를 돕는다. 설득력이 전혀 없는 엄마의 말이 해마다 반복되는 이유는 성묘하기 싫어하는 나의 등을 조금이라도 더 떠밀어 보기 위해서이다.

죽은 자의 혼령이 산 자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믿는 사람들은 그들의 넋을 위로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시간과 정성을 들여 제사를 지내고 특히 자기 조상을 위해서는 때마다 벌초하거나 성묘하러 간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풍습이 참 싫었다.


[변경 전-2]

https://brunch.co.kr/@sohee290928/14


죽은 자의 혼령이 산 자에게 영향을 끼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망자의 넋을 위로하는 일을 매우 중요하게 여겨 시간과 정성을 들여 제사를 지낸다. 특히 자기 조상을 위해서는 때마다 잊지 않고 성묘하러 간다. 나는 이러한 풍습이 별로 내키지 않았다. 흙더미에 대고 절을 하거나 술을 뿌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죽은 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데, 누구를 위해 이런 고생을 해야 하는 건지. 엄마가 일찍부터 음식을 챙기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볼멘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냥, 소풍 가는 거라고 생각하자.”

12월의 매서운 추위를 견디며 밖에서 밥을 먹자는 말에 누가 꼬임을 당하겠는가. 아빠의 첫 기일이 아니었다면 진작 손사래를 쳤을 것이다. 산소 앞에서 음식을 펼쳐놓는 일로 아빠와 함께한다는 자기 위로는 하고 싶지 않았다. 사랑하는 이의 빈자리는 무엇으로도 채울 수가 없으니까. 모두가 힘들었던 시기였는데, 스물두 살의 나는 유난히 날카로웠다.



[도입변경 및 최최종]


스무 살까지, 나는 보이지 않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무엇이든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 믿어졌다. 귀신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 공포 영화의 한 장면이 더 또렷하게 다가왔다. 할머니와 엄마가 성당에 가자고 했을 때도 심드렁했고, 제사를 지내는 일에도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저 맛있는 음식을 먹고 친척 어른들에게 용돈을 받을 수 있는 그런 날 정도로 여겼다.


내가 처음으로 무덤을 가깝게 마주한 때는 가족묘를 구경하러 간 날이었다. 당시의 나는 세상 물정을 잘 알지 못하는 중학생이었다. 왜 묫자리를 미리 사두는 건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열댓 명의 가족이 함께 방문했고, 관리인으로 보이는 남자분이 우리를 맞이했다. 그분을 따라 움직이며 조용히 걷고 있는데, 갑자기 엄마가 훌쩍였다.


“우리 중 누군가 떠난다고 생각하니 너무 슬프네요.”

엄마의 떨리는 목소리에 순간 정적이 흘렀다. 아빠는 동생의 손을 잡고 멀뚱하게 서 있었다. 분위기를 잘 띄우는 둘째 삼촌이 일부러 크게 웃으며 말했다.


“하여튼, 형수는 눈물이 많다니까! 왜 벌써 그런 말을 해요.”

아빠도 맞장구를 치며 엄마를 위로했다. 엄마는 머쓱하게 눈물을 훔쳤다. 그제야 모두가 미소를 지었고, 관리인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때 나는 엄마가 너무 감정적이라고 느꼈다. 아직 양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건강하셨기에, 많이 앞서간 상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하늘이 신호를 보내준 게 아닌가 싶다. 그곳에 가장 먼저 묻힌 사람은 다름 아닌 바로 아빠였다. 장남으로서 부모님을 위해 앞장서서 준비한 일이었는데, 결국 자기 자리가 되어버렸다. 몇 년의 암 투병 끝에, 아빠는 흰 국화 내음이 풍기는 곳에서 밋밋한 사진 한 장으로 남았다.


40대에 세상을 떠난 아빠의 빈소에는 많은 손님이 찾아왔다. 가장 넓은 장례식장이었음에도 화환이 몰려들어 놔둘 자리가 없었다. 첫째인 나는 최초로 겪는 죽음 앞에 주인 행세를 해야만 했다. 쉴 틈 없이 인사와 절을 했고, 각종 서류에 서명하느라 슬퍼할 여유마저 없었다. 발인을 앞두고 나서야 조용해졌고, 잠시라도 혼자 있고 싶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다니는데, 국화꽃 속의 아빠가 눈에 들어왔다. 사진 앞으로 다가가서 한동안 넋을 잃은 채 있었다. 멍한 내 앞으로 한 줄기 연기가 올라왔다. 다 꺼져가는 향에서 피어난 것이었다.


“향연이 아빠를 좋은 곳으로 데리고 가니까, 절대 꺼지게 하면 안 돼. 알겠지?”

장례가 시작될 때 당부했던 고모의 말이 떠올랐다. 아빠는 이미 세상에 없는데, 이게 다 무슨 소용일까. 별로 와닿지도 않는 미신은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다른 장소를 찾으려다 아빠의 얼굴에 발목이 붙잡혔다. 기다란 새 향을 향로에 꽂은 뒤, 시계를 쳐다보았다. 화장터로 출발하기까지 4시간 남짓 남은 때였다. 향 한 대가 전부 타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지만, 왠지 그 앞을 떠날 수가 없었다. 바닥에 누워 천장으로 올라가는 연기를 밤새도록 바라봤다.

길었던 사흘의 일정이 끝나고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온기가 가득했던 집에는 벌써 차가운 적막감이 맴돌았다. 우리 셋은 말없이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혼자 안방으로 들어가는 엄마의 쓸쓸한 뒷모습에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어느덧 아침이 밝아오고 얕은 잠에서 깨어났다. 방 밖에서는 엄마와 동생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예상외로 편안한 분위기인 듯해 문을 열고 거실로 나갔다. 둘은 지난밤 엄마의 꿈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빠가 엄마 이마에 뽀뽀를 해줬다니까.”

“와, 신기하다. 꿈이 아니라 진짜 같아.”

“그러니까, 아빠가 다녀간 게 확실해.”

나는 옆에 가만히 앉아 둘의 대화를 듣기만 했다. 평소 같았으면 방금 장례를 치르고 와서 무슨 소리냐고 핀잔을 줬겠지만, 그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거짓말 같은 엄마의 말이 사실이기를 바랐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사람은 죽으면 끝이라고, 어떤 의미도 없다고 생각했다. 내 인생 첫 번째 조문이 아빠가 아니었더라면 무미건조하게 지나쳤을 수도 있었다. 보이지 않아도 마땅히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을 아빠 마지막으로 알려준 듯 했다.


일주일쯤 지나, 아빠를 위한 추도 모임에서 종이에 쓰인 기도문을 대표로 읽었다. 깊게 믿지도 않는 하느님에게 읊조리는 한 문장, 한 문장이 예전과 다르게 느껴졌다. 내 앞에는 없지만 분명 듣고 있을 아빠에게 힘을 주어 한 마디, 한마디 올려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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