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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방이 다섯 개 생겼다

by 마음의 온도

“우리 이제 떨어져 지내. 각방 쓰자.”


얼마 전부터 이 한마디가 목구멍에 걸려서 나가지도 들어가지도 못하고 있었다.

오랜 결혼생활 동안 우리 사이엔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나온 적이 없는 말.

입 밖으로 내뱉어서는 안 될 금기어 ‘각방’이 목구멍 끝에서 스프링처럼 튀어나오기 직전이었다.


요즘은 개인 프라이버시가 집값만큼이나 높아진 시대다.

신혼살림을 준비하는 부부는 안방을 ‘어떻게 꾸밀까’가 아니라 ‘누가 쓸까’를 상의한다고 한다.

TV 관찰 예능 속 연예인들도 각방을 공개하는 게 자연스러운 트렌드가 되었다.

서로의 체온이 다르고, 잠버릇이 다르고, 수면의 질을 위해 각자의 공간을 존중하는 지금의 문화 속에서

‘부부가 싸워도 한방을 써야 한다’는 고정관념은 이미 올드한 멘트가 되어 버렸다.


올드하더라도, 나에게 ‘각방’은 부부의 마지노선이자 패배의 흰 깃발이었다.

결혼은 일심동체이며, 하나의 지푸라기에 엮인 굴비처럼 함께 묶인 운명 공동체라 여겼다.

오징어 게임을 하듯 죽어도 살아도 함께하는 2인 3각 경기처럼 말이다.

그렇다고, X세대의 내가 MZ세대의 유행에 합류하겠다는 건 더더욱 아니다.



PD와 작가로 만나, 한방 쓰는 부부가 되었다.

책상에 마주 앉아 함께 아이템 회의를 하고, 나란히 운전석과 조수석에 앉아 취재를 다녔다.

세상은 잠들었지만 여전히 대낮인 편집실, 하나뿐인 소파 위에선 N극과 S극처럼 새우 동침을 하다가 결국은 한방, 한 침대를 공유하는 사이가 되었다.

같은 직업, 같은 직장, 같은 나이. 동료로 만나 친구가 되고, 부부가 된 우리는 사랑과 의리로 뭉친 연합군이었다.


“아직도 한 침대에서 자?”


둘 뿐이던 우리 부대에 하나 둘 대원이 늘어났다.

까까머리 대원들이 계급이 오르는 사이, 친구들 사이에도 하나둘 각방 커플이 생기기 시작했다.

한 친구는 자랑스럽게 ‘안방 쟁탈 성공기’를 들려주었고,

또 다른 친구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오랜 각방 생활을 고백했다.

아직도 한 직장, 한 방, 한 침대를 쓴다는 우리 부부를 친구들은 ‘천연기념물’이라며 경주 유적지에 보존해야 한다고 놀렸지만, 그들의 놀림은 내게 오히려 ‘자부심’이었다.

방 하나, 침대 하나가 우리 결혼생활의 건재함을 증명해 주는 표식이라 믿었으니까.



일심동체의 자부심은 어느새 동상이몽이 되었다

우리 집은 방이 네 개다.

열심히 일하고, 덜 입고 덜 먹으며 늘린 건 작고 반짝이는 다이아몬드도, 명품 가방도 아닌 ‘방 한 개’였다. 우리의 자부심인 안방, 아이들 이름으로 하나씩 배분되고, 남은 한 칸을 공동 작업실로 꾸몄다.

책상과 노트북, 의자를 나란히 두고 남편은 편집을, 나는 방송대본을 썼었다.

나란히 커피를 마시고, 하나의 모니터로 영화를 봤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인가, 우리의 방에 작은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퇴사 이후 나는 작업실에 들어갈 일이 줄었다.

노트북 대신 주방에 더 자주 서 있었고, 소파나 침대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남편의 키보드 소리가 방해된다는, 사소하지만 분명한 이유에서였다.


남편은 작업실이, 나는 거실과 침실이 생활 동선이 되었다.

드라마의 단골 장면처럼, 자다가 깬 새벽마다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

몇 시인지도 모르는 새벽, 작업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불빛이 약 올리듯 혀를 내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청소를 하다 작업실 책상 밑에서 검은 형체를 발견했다.

그 음산한 존재의 정체는 바로 ‘3단 접이식 매트리스’. 남편은 작업실에서 밤을 새운 게 아니었다.

남편은 이동이 아닌, 정착을 택한 것이었다.

100평도 아닌 집에서, 엎어지면 코가 아니라 무릎이 깨질 거리에서 말이다.

그리고 그의 ‘양방생활’은 본격화되었다.


나는 복수를 결심했다.

퇴사 이후로 파란색으로 하한가를 치고 있는 자존감에, 버림받은 듯한 기분은 치명타였다.

일심동체는 무슨, 동상이몽의 배신감이 더 컸다.

저녁식사 후, 가족 공동의 일이 끝나면 나는 안방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는다.

‘출입 금지’ 팻말을 못질하듯. 땅·땅·땅.



내 방 하나 만들려다, 인생 최다 ‘5개 방’ 보유자가 되다


나도 ‘나만의 방’을 만들기로 했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나를 마주할 수 있는 곳, 답답하고 우울한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곳,

가족이나 집안일 같은 숙제는 잠시 잊고 오롯이 ‘나’만 생각할 수 있는 방.


생각해 보니 둘째를 낳고 만들었던 그 방이 떠올랐다. 묵은 먼지를 털고 새로 도배를 했다.

그랬더니, 다른 방이 눈에 들어왔다. 그 방을 갖고 싶어 올해 2월 입주 신고를 했다.

7월에는 옆 동네 ‘핫플’에 방 두 개를 더 얻었다.

그리고 지난 9월, 내 이름으로 된 방 하나를 마련했다.

이렇게 나는 인생 최다, 방 다섯 개의 ‘방부자’가 되었다.


물론 나는 부동산 투자자가 아니다. 대출 규제 속에서도 현금을 굴릴 여유 있는 부자도 아니다.

뉴스에 나오는 ‘떴다방’이나 ‘빌라왕’과도 무관하다.

하지만, 내 명의로 된 방이 다섯 개인 건 분명한 사실이다.


맞다. 그 방은 바로 온라인 속 내 방들이다.

순서대로 보면 네이버 블로그, 브런치, 인스타그램, 스레드.

그리고 마지막 다섯 번째, 오마이뉴스에 연재를 시작하면서 내 방이 생긴 것이다.



방은 많아졌지만, 결국 내가 찾은 건 ‘온기’였다

아침 운동을 마치면 시원한 생수를 마시며 내 방 투어가 시작된다.

가볍게 인스타그램을 지나 그 파도를 타고 스레드로 간다.

아침 햇살처럼 반기는 문구들에 마음이 정화되며 글을 써야겠다는 의욕이 세팅된다.

최근에 시작한 오마이뉴스도 메인 탑화면에 오르면서 짜릿한 전율을 주었다.

그리고 가장 오랫동안 머무는 곳은 당연히 '브런치'다.

그저께는 새로 시작한 연재가 실시간 6위에 올라서 마음이 불타는 금요일을 맞이했다.

물론 다음날 12위, 오늘은 어디로 갔는지 흔적도 보이지 않지만.



그저께 불금의 흥분을 기념하며 캡처를 했다. 안 찍었으면 어쩔 뻔. 지금은 흔적도 없다


댓글을 읽고 라이킷을 눌러주신 분들께, 어울리지 않는 귀여운 척을 하며 배꼽인사를 한다.

그리고 다른 작가님의 글방으로 방마실을 떠난다. 주로 피드 알림을 타고 글방을 노크한다.

‘나도 받았으니 갚아야지’라는 마음으로 시작한 방마실은 어느새 '수다방'이 된다.

오며 가며 작가님들을 만나면 절대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때로는 소리 없는 미소가 지어지기도 하고, 그러다가 큭큭 코를 들이마시는 소리를 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육성을 터트리며 꺼이꺼이 배꼽을 잡기도 한다.

누군가가 CCTV로 나를 관찰한다면 병원으로 연락을 할 것 같다.


한참을 웃다가, 이런 생각을 해 본다.

만약 내 방에 아무도 오지 않는다면 어떨까. 댓글 하나도, 엄지 하나도 없다면?

밤을 꼴딱 새워 만든 내 방이 텅 비어 있다면?

그때는 방이 한 개든 다섯 개든, 아무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사람이 살아가며 가장 필요한 건 ‘온기’라고 믿는다.


돈도 중요하지만, 관계에 온기가 사라지면 그건 텅빈 소라 껍데기와 다르지 않다.

누군가 눌러준 ‘좋아요’ 하나에 심장이 뛰고, 댓글 한 줄에 마음이 녹아내린다.

노트북은 전기로 작동하지만, 사실은 '사람의 온기'로 움직이는 게 아닐까.

한동안 뜸했던 인스타그램 방에 가니 꺼진 보일러처럼 썰렁하다.

냉골의 방을 덥히기 위해 책에서 메모한 문구 하나, 사진 한 장을 올린다.

금세 하트가 뿅뿅 피어나고, 식었던 방이 김이 오르듯 따뜻해진다.

그 온기 속에서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차가운 화면, 건조한 활자지만 그 안에도 저마다의 온도가 있다.

사람과 사람이 오가며 만들어내는 '온도의 힘'을 나는 믿는다.

.

.

.

.

“우리 이제 떨어져 지내. 각방 쓰자.”

그 말은 꿀꺽 삼켜서 먹어버렸다.


각방으로 선을 긋기보다, 내 방문을 살짝 열어두기로 했다.


'온기'는 닫히는 문이 아니라, 열린 문으로 흐르니까.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 게재되었으며, 브런치용으로 변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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