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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사치

by 구름정원

오늘은 특별한 날이다. 생일이나 기념일도 아니고 복권 당첨된 것도 아니다. 단지, 가족이 각기 다른 곳에서 잠을 자는, 오랜만에 혼자 집에 있는 날이다.

남편이 아침 일찍 친구들과 2박 3일 여행을 떠나면서 자유를 선물해 준 시간이다.


헝클어진 머리에 눈곱을 떼지 않은 채 하루 종일 잠옷 차림으로 집안을 어지럽혀도 뭐라 할 사람이 없다. 오히려 올 사람도, 안 한다고 잔소리할 사람도 없으니 대충 하고 살라는 남편이다. 오늘도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쉬라고 했다. 그럼에도 홀로 집에 있다는 것에 설레는 이유를 모르겠다. 행여 누가 들을세라 작은 소리로 노래를 흥얼거리며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배웅을 했다. 생각지 않은 서비스에 남편 기분이 좋아 보인다. 늦잠은 못 잤지만 일찍 일어나기를 잘한 것 같다.

드디어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나만의 세계 68시간이 시작됐다.

커튼을 젖혀보니 아직 어둠이 남아있다. 어둠 사이로 지붕과 나무 위에 눈이 희미하게 보인다. 밤사이 세상이 눈으로 하얀 이블을 덮은 듯한 변신이지만 아쉬운 양이다.

창문을 열어 차가운 아침 공기를 마셔 본다. 상쾌함은 머리에서 가슴까지 내려와 풍선처럼 공중에 떠 다닌다. 열린 문으로 들어온 찬 공기는 물 만난 고기처럼 집안을 돌아다닌다.

평소 시끄럽다는 소리에 잘 듣지 못했던 음악을 크게 틀어 본다. 사막에 비가 내리듯 바흐의 “G 선상의 아리아”가 거실을 촉촉하게 적신다. 아침 식사는 간단하게 샌드위치나 누룽지를 먹을지 아니면 친구와 브런치를 할지 망설였다. 귀찮은 생각이 들어 전날 먹다 남은 김치찌개를 냄비째 식탁에 올렸다. 이런 것이 자유로움은 아닌 것 같다. 헛웃음이 나온다. 부치기 귀찮아 냉동고에 넣어둔 명태포가 생각났다. 부치는 김에 구색을 맞춰서 보기 좋게 해야겠다. 호박과 가지도 꺼내 하얀 옷에 노란 달걀을 입혀 전을 부쳤다. 사과도 깎고 남편표 인스턴트커피 대신 원두를 갈아 내렸다. 평소 아끼고 사용하지 않던 접시를 꺼내 옮겨 담으니 제법 그럴듯하다.

스카이라운지에서 식사하는 기분을 내기 위해, 낑낑대며 식탁을 창가로 옮겼다.

간소하지만 처음으로 자신만을 위해 정성껏 차린 아침 상이다. 자신을 위해 뭔가 했다는 생각에 흐뭇하고 기분이 좋아진다. 눈 덮인 알프스의 멋진 경치를 상상하며 음악에 맞춰 천천히 음미하며 아침을 즐겼다.

내리다 말았다고 투덜거리는 소리가 하늘에 닿았는지 눈발이 날린다. 조금씩 내리던 눈은 어느덧 함박눈으로 변해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 미친 듯이 춤추는 눈을 보며 마음이 설렌다. 모자를 뒤집어쓰고 호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 넣은 체 눈을 맞으며 걸었다. 하얀 길은 뽀드득뽀드득 소리를 내며 발자국을 남긴다. 빰을 사정없이 때리는 눈에 첫사랑의 추억도 떠 오른다. 나이를 먹으면 감성이 메마른다는데 아직 살아있다. 다행이다. 자유로운 영혼처럼 눈이 계속 내린다.


늦지 않은 시간인데 벌써 날이 어두워지고 있다. 하루종일 놀고 방황만 했지 머릿속 가득했던 계획들은 그대로 있다. 늦은 시간이 되기 전에 피아노에 악보를 펼쳐 이것저것 쳐 보지만 생각처럼 손가락이 말을 안 듣는다. 문득 휴일에 피아노를 치면 약속이라도 한 듯 남편과 아이들이 삥 둘러 함께 노래 부르던 시절이 생각난다. 아이들 키우기 정신없어 빨리 지나가기를 바랐던 시간이 지금은 그립다. 지난 시간에 그리움 담아 목청 높여 노래를 불러 본다. 신경이 쓰이거나 시끄럽다는 사람이 없어서 좋다.

밤이 깊어질수록 조금씩 허전해진다. 적막함에 텔레비전이 혼자 놀고 있다. 방마다 다니며 창문과 현관문 잠금장치를 확인했다.

특별하게 느껴졌던 하루는, 어쩌면 평소보다 더 평범하게 지나갔지만 나를 만난 날이다. 쉽게 누릴 수 없는 시간이기에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모처럼 찾아온 홀로 있는 시간의 여유와 자유로움은 때때로 외로움과 고독을 느끼게 했다. 같은 하루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기억되기도 잊혀지기도 한다.

무엇인가 2% 부족한 아쉬움이 남는 하루였지만, 그 아쉬움마저도 내일을 더 기대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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