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의 온도 차이
마음이 잘 맞고 서로를 잘 아는 사람과 함께라면 여행 그 자체가 기쁨이다. 설레는 가슴으로 계획을 세우고 함께 추억을 쌓는 시간은 무엇보다 소중하다. 그래서일까? ‘그 사람을 알고 싶다면 함께 여행을 떠나라’라는 말을 종종 떠 올리곤 했다. 예전에는 그 의미를 선뜻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이제 조금은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40년 가까이 알고 지내온 동창인 친구가 있다. 자주는 아니지만, 꾸준히 안부를 나눴다. 연말 같은 특별한 모임에는 부부 동반으로 참석했다. 덕분에 남편들끼리도 친분이 생겨 서로의 소식을 궁금해하곤 했다.
어느 날 친구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남편이 원인 불명의 병으로 다리에 조금씩 힘이 빠져서 걷는 것이 점점 불편해지고 있다고 했다. 아직 걸을 수 있을 때 함께 여행을 떠나고 싶다고 했다. 안타까운 마음에 “짐을 도와줄 테니 걱정 말고 함께 가자”라고 말했다. 유쾌하지 않았던 기억으로 망설이는 남편을 어렵게 설득을 했다. 이번엔 잘 지낼 수 있을 거라 기대하며 흔쾌히 출발한 여행이었다.
공항에서 마주한 친구 부부는 커다란 캐리어 두 개와 기내 캐리어까지 가져왔다. 짐을 최소한으로 줄인 우리와 달랐다. 여행을 예고하는 듯한 무거운 캐리어 두 개는 자연스럽게 우리 몫이 되었다.
친구 남편의 불편함에 대비해 가이드에게도 미리 양해를 구했다. 여행 중 친구 부부와 일행 사이를 오가며 속도를 맞추고 길을 확인하며 걸었다. 발바닥이 아플 정도로 뛰다시피 다녔지만, 그 정도는 감수한 일이다.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각자의 관심사와 보고 싶은 것이 다름에도 여행은 모두 친구 부부 중심으로 흘러갔다. 우리는 여행지를 제대로 구경하기 어려웠다.
여행 넷째 날, 남편은 “여행이 아니라 누군가를 계속 돌보는 느낌이야”라며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이었기에 각자 보고 싶은 곳을 보고 정해진 장소에서 만나자고 제안을 했다. 친구는 "그냥 같이 다녀!"라며 불편한 기색을 보였지만 분위기가 더 나빠지지 않기 위해 각자 다니기로 했다.
이후에도 친구 부부의 익숙한 방식에 맞추려다 보니 자주 사과하고 양해를 구해야 했다. 일행에게 우리가 동창이라기보다 친척 어른으로 보일 정도였다.
귀국 후 마지막 순간에도 뜻밖의 일이 있었다. 짐을 찾고 보니 친구는 아무 말 없이 이미 먼저 떠나고 없었다. 캐리어만 건네받고 그냥 떠난 것이다. 남편에게 미안하고 섭섭한 마음이 들어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당황한 듯 미안하다며 다시 오겠다고 했다. 예전의 여행들처럼 각자의 시간을 자유롭게 즐기고 싶었다.
“각자 보자”라는 말이 친구에게는 섭섭했을까? 아직도 이유를 모르겠다. 마음을 다해 배려했던 순간들이 오히려 관계에 거리감을 불러왔다.
내 마음속에서 조금씩 자리를 내려놓게 되었지만 계속 만나는 사이다. 친구를 향한 마음은 여전하지만 그 거리와 방법은 달라졌다. ‘여행을 함께하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에 조금은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 여행은 풍경을 보는 시간이자 관계의 온도를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하니까.
아쉬운 여정이었지만, 내 마음속 풍경 하나가 또렷해진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