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눈 위에 글을 쓰다
흰 눈 위에 글을 쓰다
白雪無塵地 (백설무진지)
하얀 눈, 티끌 하나 없는 땅 위에 내리고
孤心寫寂寥 (고심사적요)
외로운 마음이 적막함을 써 내려가네
筆寒隨氣靜 (필한수기정)
차가운 붓끝은 고요한 기운을 따라 흐르고
思遠化雲飄 (사원화운표)
생각은 멀리, 구름처럼 흩어지네
눈이 내린 대지 위에는 아무 흔적도 없습니다.
그 위에 시인은 조심스레 마음의 문장을
그려 넣습니다.
말은 사라지고, 오직 침묵이 종이처럼 펼쳐진 세상에 남습니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붓끝은 따뜻합니다.
그것은 살아 있음의 미세한 떨림, 사유의 숨결입니다.
그리고 그 생각은 결국 구름처럼 흩어져,
자취 없이 하늘로 스며듭니다.
《白雪書思》는 ‘겨울과 창작’을 겹쳐놓은 시입니다.
눈은 모든 소리를 삼키고 세상을 무진(無塵)의 공간으로 되돌립니다.
그곳에서 작가는 글을 쓰지만, 그 글은 남기기 위함이 아니라 사라지기 위한 기록입니다.
즉, ‘글쓰기’는 존재를 드러내는 행위가 아니라, 존재를 비워가는 수행의 과정으로 그려집니다.
세 번째 구절의 ‘筆寒隨氣靜(필한수기정)’은
창작이란 마음의 움직임이 아닌, 고요를 따라가는 자연스러운 호흡임을 말합니다.
마지막 구절에서 사유가 구름처럼 흩어지는 장면은
‘생각조차도 머물지 않는 자유로운 경지’를 상징합니다.
이 시는 “쓰는 일은 결국 지우는 일이다”라는 깨달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눈 위에 글을 쓰면 곧 녹아 사라집니다.
그러나 사라졌다고 해서, 그 글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 순간의 마음, 그 떨림은 이미 세상과 섞여
‘흔적 없는 존재’로 남습니다.
《白雪書思》는 글을 통해 세상에 남기기보다,
글을 쓰며 자신을 지우는 ‘비움의 창작론’을 말하고 있습니다.
겨울의 백설은, 작가에게 ‘표현의 끝이자 침묵의 시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