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느껴지는 날이 있다.
일에 쫓기지도 않고, 누구의 기대도 짊어지지 않아도 되는 평온한 오후. 창밖으로 스치는 바람에 마음이 흔들릴 때면, 오래된 사진첩처럼 기억들이 한 장씩 펼쳐진다. 떠오르는 건 크고 화려한 장면들이 아니라, 스쳐간 표정과 흘려보낸 말, 그리고 누구도 기억하지 못할 작은 내 모습들이다.
나는 지금, 그때의 나를 조용히 불러낸다.
늘 어딘가로 서두르던 나, 잘하려 애쓰던 나, 실망하지 않으려 버텼던 나. 그렇게 애를 쓰면서도 늘 부족하다 느끼던 시절의 나.
어린 날, 거절당하는 게 두려워 끝내 “싫다”라는 말을 삼켰던 순간들.
사랑받고 싶어 나를 숨기던 연애.
회의 시간 내내 마음속 말을 꾹 눌러 담았다가 결국 아무 말도 못 한 하루.
그때의 나는 언제나 ‘괜찮은 척’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돌아보면 내 삶은 늘 ‘조금만 더’라는 말 속에 묶여 있었다.
조금만 더 열심히, 조금만 더 참자, 조금만 더 잘해야 한다는 다짐. 그 ‘조금’이 차곡차곡 쌓여 결국 지금의 내가 되었고, 어느 날 문득 너무 멀리 와버렸음을 깨달았다. 내가 정말 원하는 것과 세상이 요구하는 것 사이에서 균형을 잃은 채, 지나온 시간을 홀로 짊어진 사람처럼 지쳐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달라지기로 했다.
더 이상 과거의 나를 다그치지 않기로.
실수와 실패를 후회하기보다, 그때 최선을 다했던 나를 따뜻하게 바라보기로 했다.
그건 어쩌면 지금의 나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일지 모른다.
지나온 나를 미워하지 않는 마음.
수많은 실수들, 하지 못한 말들, 도망쳤던 장면들까지도 ‘그럴 수밖에 없던 나’였음을 인정하는 일. 상처를 무릎 꿇게 하지 않고 다정히 끌어안는 일.
어떤 기억은 여전히 아프다. 하지만 이제는 그 아픔을 밀어내기보다 조용히 손을 잡고 앉아 있는 법을 배웠다. 상처는 덮는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정면으로 마주했을 때 조금씩 옅어지고, 말을 걸었을 때 서서히 멀어진다. 나는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것을 알게 되었다.
과거의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단순하다.
“잘 살아줘서 고마워.”
수많은 외로움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았고, 두려움 속에서도 도망치지 않았다. 비틀거린 날도 있었지만 결국 오늘에 닿았다는 것만으로, 나는 그 시절의 나를 꼭 안아주고 싶다.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일 뿐이다.”
그러나 나는 안다.
과거는 사라지지 않는다. 여전히 우리 안에서 말을 걸고, 때때로 지금의 나를 불러 세운다.
그래서 지나온 나를 외면하지 않고, 그때의 마음을 정리하는 일은 지금의 나를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 미처 흘려보내지 못한 눈물, 끝내 꺼내지 못한 말들을 다시 불러내어 다독이는 시간. 그것이야말로 ‘내가 나를 사랑하는 시간’이다.
우리는 종종 너무 많은 걸 이루어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어쩌면 가장 중요한 일은 ‘내가 나였던 시간’을 기억해 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넘어졌지만 다시 일어난 순간, 포기하고 싶었지만 끝내 붙들었던 마음, 그 모든 기억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오늘의 나는 지나온 나의 모든 조각이 모여 완성된 사람이다. 그 어떤 조각도 헛되지 않다. 그래서 이제는 과거의 나를 탓하지 않고 그저 따뜻하게 안아주려 한다. 그 시간의 모든 나는 곧 나였고, 그 모든 나를 거쳐 지금의 내가 있다.
삶은 흐르고, 우리는 그 흐름 속에서 흔들리고, 때로는 놓치고, 다시 붙들며 조금씩 나아간다.
그러나 어떤 순간이든, 그때의 나를 지금의 내가 안아줄 수 있다면 우리는 조금 더 단단해질 수 있다.
오늘, 나는 다시 내 안의 어떤 시간을 꺼내본다.
그때의 내가 지금의 나를 바라본다면, 나는 그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고 싶다. 미소 지을 수 있기를. 그리고 조용히 말할 수 있기를.
“괜찮아, 정말 잘했어. 지금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