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어진 인생이 거추장스럽다
계절을 막론하고, 창가의 소파에 누워, 정수리를 적당히 간질이는 햇볕에 온몸이 감기는 기분은 언제나 좋다.
지겨운 나이트 근무(야간 근무)를 끝내고 뻐근한 어깨와 단내 나는 입냄새에 스스로가 질식할 것만 같을 때도, 밤새 깨지 않고 열심히 잔 덕에 수면욕이 소멸한 상태에서도, TV를 보며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적당히 배가 부른 상태에서도. 대부분의 현대인들이 도시에 아파트, 혹은 빌라라는 공학적인 선과 면이 존재하는 공간에서 생활하기로 마음먹었기에 이전만큼 싱그럽고 청아한 자연을 만나기 어렵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햇빛만큼은 이전이나 현재나, 시공간의 제약을 넘겨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준다.
그런데 이게 지겨워지네, 싶었다. 햇볕이 뜨거워서 그런가, 차양도 내려보고, 누워서 TV를 봐보기도 하고, 맛있는 음식과 술을 먹어보기도 했지만 그냥 그런 행위가 되어버렸다. 행복한 기분을 느끼기 위한 나만의 루틴이, 그냥 나만의 루틴이 되어버린 것이다. 마치 아침에 일어나서 양치를 하고, 샤워를 하고, 밥을 먹는 것처럼. 안 하면 허전하고 기분이 좋진 않겠지만, 한다고 이전처럼 무조건적인 행복이 따라오지 않는다. 이전만큼 그립거나 해가 지는 밤에 어서 내일의 햇빛을 맞고 싶어 기다려지지 않게 되었다.
이를 시작으로 삶이 지루하고, 모든 것이 단순해졌다.
일을 하고, 생각을 하고, 책을 읽고, 사람을 만나고. 우울증인가, 뇌가 퇴화하고 있나 싶어 쉴 새 없이 뇌를 사용해 보았지만 큰 다름이 생기지 않는다. 문제는 모든 것이 익숙하다는 것이었다. 책의 내용은 다를지언정 기승전결이 뚜렷한 짜임새의 플롯들, 친구들을 만나고 새로운 소식을 나눔 하며 얻게 되는 새로운 지식과 자극들. 책을 이쯤 읽었으면 튀어나와야 할 복선과 반전이 시시했고, 새로 알게 된 친구의 이야기도 사실 그다지 새롭지 않았다. 나의 새로운 소식들이 그들에겐 자극이 될 수 있었지만 나에겐 그냥 ‘어제의 나’를 바라보는 ‘오늘의 나’ 일뿐. 예견이 가능한 자극들은 길게는 하루, 짧게는 그 순간을 넘기지 않는다. 드디어 내 몸과 마음이 이것에 절여져 버렸다. 이렇게 40년, 50년을 더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답답하다. 그리고 머지않아 복잡한 듯 단조로운 삶이 우울하고 끔찍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어쩌면 아직 매일 찾아와 내 몸에 감기는 햇볕이 아직 지겹고 싫증 나지 않을 때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남은 삶이 아깝진 않았다. 단지, 삶을 마땅히 버릴 이유도 없을 뿐.
‘옮기자’
버리지 못한다면 바꿀 순 있다. 단순한 이치여서 그다지 눈여겨보지 않았던 논리가 문득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30여 년간 나의 선택들이 중첩되어 만들어진 내 삶을 벗어나는 것은 어떨까, 고민을 하게 되었다. 다시 태어날 순 없으니, 지금의 선택들을 버려보면 어떨까. 태어났을 때보다 낡은 신체와 이미 고착화된 인격은 바꿀 수 없겠지만 어쨌거나 새로워진 삶이 될 것이다. 나쁘지 않았다. 예상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복잡한 기계 같은 내 삶이 단조롭지만 찬란하길 바란다.
무릇 새 술은 새 부대에. 새로운 삶은 새 터전에서.
그래서 뜬금없이 독일로 가게 되었다.
예측이 가능하고, 아는 사람의 사람들이 있으며, 이에 익숙해지기 쉬운 미주권은 삶의 옮김의 의미가 금세 바랠 것이라 선택하지 않았다.
옛이 그리워진다면, 다시 소파에 누워서 햇볕을 느껴면 된다.
가보자고, 아무도 없는 독일로.
*2025년 1월부터 독일 생존기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