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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수습일지 #멍

버텨낸 하루

by 시크팍

추석 연휴와 신당역 살인사건으로 정신없던 한 주를 보내고 주말이 왔다. 토요일에는 첫 회사 동기들의 결혼식이 있었다. 사내 커플이었던 두 사람은 결국 결혼까지 했다. 다른 동기와 내가 축가를 해주기로 했는데, 한창 마와리를 돌던 시기라 동기와 축가를 맞춰보기 힘들었고 결국 각자 한 곡씩 축가를 불렀다. 동기가 먼저 부르기로 했는데, 탬버린까지 챙겨 와 트로트를 부르며 무대를 뒤집어 놓았다. 나름대로 준비해 간 내 ‘아로하’는 묻힐 수밖에 없었다.


일요일은 출근이었다. 영등포라인 2진 선배에게 보고를 하기로 했는데 일보를 받은 선배는 나와 출근한 동기에게 1진 선배에게 지시를 받으라고 했다. 알고 보니 2진 선배가 태풍 이슈로 제주도 출장을 가게 된 상황이었다. 당시 1진 선배는 천사 같은 선배로 알려져 있었다. 항상 수습들을 격려해 주고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려고 했다. 무엇보다 점심시간을 매우 여유 있게 주었는데, 모 동기는 이 시간을 활용해 머리를 자르고 오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나와 동기는 1진 선배에게 지시를 받기 위해 연락했지만 일단 대기하라는 지시만 있었다. 급하게 2진 선배의 출장이 결정되며 여러모로 정신이 없던 선배는 우리를 1시간가량 방치했다. 나와 동기는 카페에 앉아 카톡으로 수다만 떨었다. 동기와 회사 욕도 하고, 신세 한탄도 하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났고, 드디어 선배에게 연락이 왔다.


마와리를 돌고 보고하라는 선배는 나에게 입봉 한 거 같던데 오후에 총을 맞을 수도 있으니 참고하라고 했다. 2진 선배도 출장길에 올랐던 터라 아직 입봉 하지 않았던 동기는 내가 무조건 총을 맞을 거라며 놀려댔다. 마와리를 돌고 보고를 올리니 1진 선배는 일단 밥을 먹으라고 했다. 그리고 나에게는 전화를 달라고 했다. 느낌이 썩 좋지 않았다. 선배에게 전화해 보니 예감대로 총을 맞았다. 그래도 다행인 건 한강 멍 때리기 대회 총이었다. 동기도 그래도 꿀 총이라며 위로했다.

점심을 먹고 멍 때리기 대회가 열리는 한강 잠수교로 향했다. 잠수교로 향하는 중에도 지시는 계속 바뀌어 갔다. 아마도 오후 데스커가 출근하며 가르마를 타는 중인 것 같았다. 그 덕에 내 기사는 5분 전에는 “코로나로 3년 만에 열린 멍 때리기 대회”였는데, 지금은 날씨 스케치 기사가 되어 있었다. 멍 때리기 대회 말고도 다른 스팟 취재도 필요해 동기도 일정에 동원이 됐다. 그리고 5분 뒤에는 날씨 스케치 기사가 전국부로 넘어가며 나는 취재지원으로 멍 때리기 대회만 취재해서 넘기게 되었다. 동기는 다시 마와리를 돌게 됐다.


그렇다. 또 킬이었다.


또 연습해 볼 기회를 놓쳤지만 당시로서는 일찍 퇴근할 수 있었기에 기분이 좋았다. 불과 이틀 전까지 살인사건과 집회 취재를 하다가 이런 현장에 가니 마음이 편하기도 했다. 현장에서 영상취재 선배와 만나 스케치를 따고 참가자 인터뷰를 진행했다. 독특한 참가자들이 많았는데, 눈에 띄는 가족 참가자가 있었다. 경찰인 아빠와 함께 엄마와 아이가 경찰 복장을 하고 출전한 가족이었다. 경기가 종료되자마자 달려가 인터뷰를 선점했다. 덕분에 기사에 경찰 가족의 인터뷰가 잘 들어갔다.


대회 시상식까지 일정을 마치고 회사로 복귀했다. 현장에 남아 곧바로 집으로 가면 좋았겠지만, 스쿠터를 종로서 앞에 세워뒀던 터라 회사행을 택했다. 회사 로비에 가니 정치부 정 선배가 있었다. 사주시는 커피를 마시며 담배를 태웠고, 이내 1진 선배도 내려왔다. 1진 선배가 로비에서 기다리라기에 다른 지시가 있는가 했지만 선배는 고생했다며 간식거리를 사주며 퇴근 지시를 했다.


이날 동기와 수다를 떨며 요즘 하루를 살아가는 게 아니라, 버텨내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아침부터 멍하니 선배 지시만 기다리다가, 결국 멍 때리기 대회로 끝낸 하루였다. 그렇게 또 하루를 버텨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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