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둠을 비춰준 빛을 만난 순간
늘 그래 왔듯이, 겨울은 유난히 차갑고 길었다.
눈을 뜨기만 해도 하루가 시작된다는 사실이 버겁게 느껴졌고,
잠깐 숨을 고르며 멈춰 서는 일마저
왠지 큰 결심이 필요한 일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그래도 시간은 어김없이 흘렀다.
버거웠던 날도, 울컥하던 날도,
조용히 살아낸 수많은 순간들이
뒤돌아보면 어느새 눈처럼 포슬포슬 쌓여 있었다.
그날들 속에서 나는 걷다가 멈추고,
멈추다가 다시 걷는 일을 반복했다.
아무도 모르게 벌어지는 싸움 속에서
주저앉고 싶은 마음을 달래가며
그저 앞으로 나아가려 애썼다.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 길 위에서
나는 수없이 나 자신에게 물었다.
‘이 겨울을 지나면, 정말 조금은 달라질까?’
‘나는 지금 어디쯤을 향해 걷고 있는 걸까?’
이 길의 끝이 해피엔딩일지, 새드엔딩일지,
혹은 아무 결론도 없이 그저 지나갈지조차 알 수 없었다.
얼마나 더 걸어야 한다는 안내판도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 모든 불확실함 속에서
내가 붙잡을 수 있었던 건 단 하나,
멈추지 않고 다시 한 걸음 내딛는 것.
그렇게라도 살아내는 것뿐이었다.
그날도 손등이 부르터 까질 만큼 매서운 바람이 불었다.
피부가 얼어붙을 듯한 그 차가움 앞에서
나는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발끝을 동동 굴렀다.
찬바람에 맞서 보려고 온몸을 단단히 조여도
따뜻함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어깨는 저절로 움츠러들었고,
그와 함께 내 마음도 조금씩 작아졌다.
어느새 나는
세상 한가운데 서 있는 사람이 아니라
가장자리로 밀려난 사람처럼 느껴졌다.
누가 불러주지 않으면 사라질 것 같고,
말하지 않으면 존재가 흐릿해질 것 같은,
쓸쓸하고 얼어붙은 감정들 속에 가만히 갇혀 있었다.
뉘엿뉘엿 넘어가는 해를 바라보다 보면
잠깐 머물렀던 희미한 온기마저
금세 밀려오는 어둠 속으로 삼켜졌다.
그렇게 또 하루가 캄캄해졌다.
빛이었다.
그래, 정말 분명한 빛이었다.
한겨울 바다 위에서
세상을 비추는 등대처럼,
칠흑 같은 어둠을 가르고 다가온
선명하고도 따뜻한 한 줄기의 빛.
그 빛은 아주 조용히,
그러나 한 번도 망설임 없이 내게 스며들었다.
어둠 속에서 오랫동안 떨고 있던 나에게
‘괜찮아’ 하고 말없이 손을 내미는 것처럼.
처음엔 그 빛을 밀어내기도 했다.
몸을 웅크리는 것이 습관처럼 굳어 있었고,
나를 보호한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날카로운 가시를 세워 상대를 찌르기도 했다.
그런데도 그는 멀어지지 않았다.
차갑고 투박한 나의 방어가
그의 마음을 찌르는 순간조차
그는 등을 돌리거나 숨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그리고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따뜻하게
내가 힘들어 잠시 숨을 고르는 그 순간까지도
곁을 지켜주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내 겨울을 기다려온 사람처럼.
그 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겨울밤 특유의 고요한 기운 속에서
그의 말 없는 숨결마저 또렷하게 느껴졌다.
사랑을 이야기하는 그의 눈빛은
첫 소풍 전날 잠 못 드는 어린아이처럼
설레고 반짝거렸다.
붉어진 볼이 추위 때문인지,
아니면 떨리는 마음 때문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자꾸만, 자꾸만 사랑을 말했다.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내 행복을 위해 살아가겠다고.
용기와 두려움을 동시에 쥔 그의 손끝이
내 손을 잡을 듯 말 듯
몇 번이고 망설였다.
그 망설임 속에서
그의 진심이 얼마나 깊은지 또렷하게 느껴졌다.
그의 속삭임은 눈물겹게 따뜻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마음이 스르르 기울어졌다.
어떤 모습이어도, 어떤 마음이어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곁에 있다면
그 삶은 분명 조금 더 따뜻해질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밤새 피곤한 눈을 비비며 전화를 붙잡던 시간,
사소한 이야기 하나까지 나누던 순간들이 좋았다.
단 1분이라도 보기 위해
숨 가쁘게 달려와 주던 그의 발걸음이 좋았다.
툭툭 무심하게 둘러싼 신문지 사이에서
은은하게 새어나오던 장미꽃 향기를
전해주던 그 투박한 손길도 좋았다.
모두, 모든 순간이 다 좋았다.
그 겨울, 우리 사랑은
참말 아름다웠다.
내 생의 모든 겨울을
다시 처음부터 써 내려가고 싶을 만큼,
아름답고, 또 찬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