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태어난 순간, 나도 엄마로 다시 태어났어.
아이는 뱃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났다.
무시무시한 입덧이 날 괴롭혔지만,
그럼에도 아이가 건강하게 크고 있다는 사실이
그저 신기하고, 감사할 따름이었다.
나는 자연분만에 대한 욕심이 있었다.
아마도 그것은 친엄마에게 품었던
오래된 원망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엄마와 똑같은 것은 다 싫었고,
닮는 것조차 거부하고 싶었다.
어릴 적 귀에 박히도록 들었던 한 마디,
“너를 수술로 낳는 바람에
동생들도 다 제왕절개로 낳아야 했다.”
그 말은 어린 내게
마치 ‘내 존재가 잘못 태어난 것’ 같다는
부정적인 그림자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당연하다는 듯이
‘나는 꼭 자연분만을 할 거야’
스스로에게 수없이 다짐했는지도 모른다.
물론, 아직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진통이었기에
그 다짐은 오만하고도 용감했다.
나는 무모할 만큼 자신만만했고,
“나는 무조건 자연분만할 거야!”
스스로를 채찍질하듯 큰소리로 되뇌곤 했다.
하지만 삶은 언제나 내가 그린 대본과는 달랐다.
아이 머리가 유독 크다는 원장님의 말에
자연진통을 기다렸다가는
오히려 위험할 수 있다는 진단이 내려졌다.
그 순간, 나는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외쳤다.
“네, 유도분만 할게요!”
그토록 고집스럽게 지켜내려 했던 다짐이
순식간에 무너지고 바뀌는 순간이었다.
나는 아이를 위해, 나를 위해
그저 가장 안전한 길을 선택했을 뿐이었다.
병원 복도를 걸어 들어가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인생은 늘 이렇게 예상치 못하게 흘러가는구나.’
그런데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 모든 변수가 결국 나를 이 자리까지 이끌어왔음을.
유도분만을 하기로 한 날,
나는 아침 8시 40분에 병원에 도착했다.
내가 시간을 또렷이 기억하는 이유는
그저 우연이 아니었다.
확신의 J답게, 모든 과정을
빠짐없이 기록해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폰 메모장에는 시간별로 세세히 과정을 적을
빈칸들이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9시 10분, 내진과 초음파.
굴욕의자라 불리는 그 의자에 앉아
자궁문이 열렸는지를 확인하는 순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불쾌하고, 낯설고, 또 수치스러웠다.
손가락이 내 안을 스쳐 지나가는 그 느낌이
몸속 깊은 곳까지 차갑게 전해졌다.
하지만 아이를 만나기 위해서는 거쳐야 하는 관문이었다.
9시 30분, 태동검사.
아이의 심장 박동이 규칙적으로 들려올 때마다
“그래, 괜찮아. 아직 잘 버티고 있구나”
속으로 아이에게 속삭였다.
그리고 9시 56분, 촉진제를 투여.
무통주사까지 연결하자
비로소 ‘분만’이라는 단어가 피부에 와 닿기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되돌아갈 수 없는 길.
내 몸과 아이가 함께 이 길을 건너야만 했다.
처음엔 정말 참을 만했다.
생리통보다 조금 더 아픈 정도라서
남편과 농담을 주고받기도 하고,
심지어 인스타 스토리까지 올릴 정도였다.
“아, 이게 진통이구나.”
그때까지는 기대와 설렘이 나를 지배했다.
‘이 정도면 나 잘 해낼 수 있겠는데?’
나 스스로에게 그렇게 속삭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평온은 오래가지 않았다.
양수가 터지는 순간, 모든 것이 달라졌다.
갑작스럽게 몸을 휘감는 뜨겁고 묵직한 감각.
‘아, 지금까지의 고통은 다 가짜였구나.’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찢어질 듯한 고통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숨을 들이쉴 틈도 없이 한 파도가 밀려오면
곧 이어 또 다른 파도가 덮쳐왔다.
매 순간, 매 초마다 포기하고 싶었다.
내가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내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머리를 쥐어뜯고, 침대 난간을 붙잡아 흔들며
신음과 울음을 섞어 소리쳤다.
남편의 손이 내 손을 덮을 때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 손을 꼬집었다.
누군가를 원망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만큼
고통은 나를 집어삼켰다.
“다 너 때문이야!”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에게조차
원망의 화살을 던지는 나를 발견하고는
나 스스로도 놀랐다.
사랑으로 낳는다는 이 길이
어째서 이렇게 잔인한가.
무통주사를 달라고, 제발 더 달라고
미친 듯이 외쳐 보았지만
내게는 아무런 효과도 느껴지지 않았다.
내 귀에 들리는 건 간호사의 차분한 목소리와
나 자신의 흐느낌뿐이었다.
그저 끔찍한 고통이 끝나기를 바라며
숨을 몰아쉬고, 눈을 질끈 감았다.
눈꺼풀 안쪽에서 눈물이 맺히고,
이대로 기절해버리면 좋겠다는
절망적인 생각까지 스쳤다.
아랫배에 묵직하고 뻐근한 압박이 밀려오자
간호사의 지시에 따라
본격적인 힘주기 연습이 시작되었다.
“산모분, 아랫쪽으로 변보듯이 힘주세요.
얼굴로 힘주시면 실핏줄 다 터져요.
숨 크게 들이마시고, 자! 하나, 둘, 셋- 끙!”
그 말들이 내 귓가에 울려 퍼졌다.
나는 어떻게든 이 시간을 끝내고 싶었다.
죽을 만큼 아픈 순간에도 마음속에는 단 하나,
‘제발 이 지옥 같은 시간이 어서 끝나기를.’
그 간절한 바람 하나로
사방에서 부서져 나가는 듯한 몸을 추스르며
남은 힘을 한 줌, 또 한 줌 끌어모았다.
그러던 중, 갑자기 ‘뚝-’ 하는 소리와 함께
몸 깊숙한 곳에서 고관절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전해졌다.
출산 중 고관절 탈구가 생길 수 있다고는 들었지만
그게 내 이야기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몸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순간조차 진통의 고통에는 미치지 못했다.
의료진이 빠르게 내 몸을 살피며 조치하는 사이,
나는 고통을 꾹 삼키며 다시 숨을 고르고 힘을 모았다.
“끙... 끙...” 숨소리와 함께 몸을 움켜쥐듯
몇 번이고, 또 몇 번이고 버텨냈다.
그러다 마침내,
내 몸속에서 무언가가
‘쑥-’ 빠져나가는 묘한 감각이 전해졌다.
잠시 후, 내 배 위로
뜨겁고, 물컹한 무게가 올려졌다.
피와 양수의 냄새가 뒤섞여 있었지만
그럼에도 분명히 생명의 온기를 품은 존재였다.
아이였다.
열 달 동안 내 품 안에서 자라
마침내 내 몸을 통해 세상으로 나온,
내 첫 아이였다.
나는 저절로 울음이 터져 나왔다.
아이의 태명을 부르며,
“엄마야…” 라는 한마디를 내뱉는 순간
지금까지의 고통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울음소리조차 아직 여운처럼 공기 중에 머무는
작고 연약한 생명체를 바라보며
나는 내 삶이 이제 완전히 달라졌음을,
되돌릴 수 없는 어떤 문턱을 넘었음을 알았다.
숨이 가쁘게 오르내리는 가슴 위로
아이는 여전히 따뜻하고 무겁게 올려져 있었다.
나는 떨리는 손끝으로 조심스레 아이를 감싸며
그제야 온전히 느꼈다.
내가 품고, 내가 낳아낸
내 첫 아이의 체온을.
그리고 그 작은 체온은,
세상의 어떤 고통도 단번에 무너뜨리고,
내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거대한 기적의 불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