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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가 생겼다.

나는 연년생 형제를 품을 그릇이 아니라 여겼다.

by 온오프

내가 비혼주의자였다는 사실은 이제 와서
주변 사람들에게 아주 좋은 놀림거리가 되어버렸다.


“아니, 네가 어떻게 결혼을 했어?”
“너도 결국 애 셋 엄마가 됐구나!”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말이라는 게 얼마나 오래 남아 사람을 따라다니는지 실감한다.

세상에 ‘절대’라는 건 정말 존재하지 않는 건가 보다.


결혼? 그건 미친 짓이라며 단칼에 잘라 말하던 내가
어쩌다 보니 아이 셋의 엄마가 되었다.


그것도 연년생 형제들을 품에 안은 엄마가 될 줄이야.


스스로를 돌아보며 놀라는 순간이 아직도 많다.


둘째를 임신한다는 건 결코 쉽지 않았다.
첫 임신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시작이었다.
하루하루가 예측 불가능한 버라이어티였다.


돌도 지나지 않은 첫째를 돌보느라
아침부터 밤까지 몸은 늘 바쁘게 움직였고,
하루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때가 많았다.


눈을 뜨면 젖병을 씻고, 기저귀를 갈고, 울음을 달래고,
잠시 한숨 돌리려 하면 다시 아이가 깨어 울었다.
그 속에서 ‘임신’이라는 사실은
내 삶 속에서 금세 희미해져 버리곤 했다.


빠르게 불러오는 배를 바라볼 때마다
그제야 “아, 맞다. 나는 임산부였지.”
하고 스스로를 되새기는 게 전부였다.


아이를 안고 뛰어다니는 내 모습과,
점점 무거워지는 배 사이에서
현실감은 늘 어딘가 모르게 어색하게 뒤엉켜 있었다

.

그래서였을까.
결국 몸은 무너져 내릴 듯 적신호를 보냈다.


잠을 자도 개운하지 않고,
숨이 가빠지고, 작은 일에도 눈물이 차올랐다.

내 몸과 마음이 한계에 닿았다는 걸
그제야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큰아이를 번쩍 들어 올린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때부터 갑자기 배가 단단히 뭉치듯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임신을 하면 배가 점점 커지면서 뭉침이나 당김이 생기곤 한다.


게다가 변비는 거의 따라붙는 손님처럼 늘 함께해서
웬만한 복통에는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또 그러려니…” 하고 넘길 법도 했다.

하지만 이번 통증은 달랐다.
아이를 한 번 출산해 본 경험이 있었기에
내 몸이 보내는 신호가 보통이 아니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아무리 둔한 나였어도, 이번만큼은 그냥 넘길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참을 참고 또 참았다.
‘조금만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하며 스스로를 달랬지만,
통증은 점점 더 거세지고, 몸은 점점 더 경직되어 갔다.


결국,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병원으로 향했다.

그리고 내려진 진단은 조기진통이었다.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이대로라면 조산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말에
머릿속은 하얘지고, 온몸은 차갑게 굳어버렸다.


다른 걸 생각할 겨를조차 없이
곧바로 고위험 산모 병실에 입원해야 했다.


침대에 누운 채 뱃속 아이가 무사하기만을 빌었다.
아이가 혹시라도 세상 밖으로 너무 일찍 나오진 않을까,
작은 울음소리도 듣기 전에 사라져 버리면 어떡하나.
그 걱정이 밀려올 때마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다 문득 집에 두고 온 큰아이 생각이 또 스쳤다.
어린 손자를 맡아 돌보실 시부모님이 얼마나 힘드실까,
엄마 품을 찾을 아이는 또 얼마나 불안할까.
걱정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그 걱정 위로 눈물은 멈추지 않고 쏟아졌다.

나는 그저 자꾸만, 자꾸만 울 수밖에 없었다.



내가 입원한 고위험 산모실은 이름 그대로였다.
임신 중 위험요소가 있는 산모들만 들어올 수 있는 그 병실은
마치 조용하지만 치열한 전쟁터와 같았다.


그곳에 누워 있는 사람들은 모두 전쟁터로 내몰린 군인들이었다.
뱃속의 아이를 지키기 위해
각자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싸우고 있었으니,
총소리만 나지 않을 뿐, 그곳의 매일은
살아 있는 전투 그 자체였다.


나는 매일 주기적으로 태동 검사를 받았다.
검사 시간이 다가올 때마다 손끝이 저릿해지고,
심장은 미친 듯이 빨리 뛰었다.
혹시라도 이상이 발견되지는 않을까
그 불안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모니터에서 또렷하게 들려오는
아이의 건강한 심장 소리,
그리고 간호사 선생님이 건네는
“괜찮습니다”라는 짧은 말 한마디에
온몸의 긴장이 순식간에 풀려나갔다.


나는 그제야 조심스레 배를 쓰다듬으며
“다행이다” 하고 속삭였다.


그렇게 하루에도 몇 번씩
불안과 안도, 안도와 불안 사이를 오갔다.
롤러코스터처럼 요동치는 감정은
나를 지치게도 했지만 동시에 버티게도 했다.


걸려오는 전화기 너머,

“엄마—” 하고 부르는 아이의 목소리에

울컥, 눈물이 목끝까지 차오르고 코끝이 시큰해진다.


그 순간만큼은 여우주연상 배우 못지않게 연기를 펼쳐야 했다.


“아들~ 밥 먹었어? 오구오구 잘했네.

사랑해, 아들. 엄마도 보고 싶다.”


차오르는 울음을 꿀꺽꿀꺽 삼켜 가며

태연한 척 아이에게 사랑만을 가득 전했다.


그리고 하루의 끝.

어두컴컴한 병실, 외로이 켜져 있는 불빛 하나.

그 불빛 아래서 나는 조용히 흐느꼈다.


불빛 속에는 아이의 얼굴,

함께 보낸 날들의 기억,

아직 끝나지 않은 그리움이 차곡차곡 담겨 있었다.


그 애틋함과 고독은, 직접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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