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한마디로 나를 살린다.
동생과 내가 오래전부터 우스갯소리로 주고받는 농담이 있다.
잠을 안 자면 그건 결국 빚으로 남는다는 것.
그리고 그 빚은
웬만한 사채보다 무서운 속도로 불어난다.
잠이 부족해질수록 사람은 퀭해지고
그 빚은 언젠가는 반드시 갚아야 했다.
몇 날 며칠 쌓아 둔 피로가 도저히 버티지 못할 만큼 되면
낮잠을 자러 가면서 동생은 내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언니야, 내 오늘 빚 갚는 날이다.
빚 갚으러 간다.”
그러곤 늘어지게 낮잠타임을 가지곤 했다.
그날의 나도 그랬다.
며칠간 매일 잠이 부족했고,
피로가 잔뜩 쌓여 있어서
온종일 비몽사몽한 상태였다.
해야 할 일들을 대충 처리하고 나니
이제는 집안일이 한가득 쌓여 있었고,
숨 돌릴 틈도 없이 어느새 하원 시간이 다가왔다.
결국 단 1분도 쉬지 못한 채
아이 셋을 데려와 먹이고, 씻기고 챙기고,
그 과정에서 나는 이미 진이 빠져 있었다.
장난감을 서랍에 정리하면서
나도 모르게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하… 힘들다.”
그 짧은 한숨을
5살 큰아이가 놓치지 않았다.
아이는 내 표정을 살피더니
작은 발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엄마 힘들어요? 엄마 아파요?”
나는 놀랐지만 태연한 척 답했다.
“응, 엄마 오늘은 좀 힘드네. 괜찮아.
아들 보니까 힘난다. 불끈불끈.”
그런데, 그 다음 순간.
아이가 마치 드라마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내 볼을 양손으로 감싸더니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엄마, 장난감 정리하지 마요.
아무것도 하지 마요.”
그리고 아주 진지하게, 결의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다 포기해요.”
푸, 실소가 나왔다.
포기… 하라고?
하지만 아이는 멈추지 않았다.
“엄마 다 포기해요.
내가 할게요.
내가 정리할게요.”
잠시 멍해졌다.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싶은 순간이었다.
어찌 너는 다섯 살임에도
나보다 더 대견할까.
철없는 엄마가 감추지 못한 투정을 내뱉었는데,
아이의 마음은
그걸 책임지려 하고 있었다.
세상은 나에게 늘 말했다.
포기하지 말라고.
엄마니까 견디고, 버티고, 해내야 한다고.
하지만 아이는 말했다.
“엄마, 다 포기해요.”
그 한마디가
내 어깨 위에 얹힌 모든 책임을 가볍게 풀어냈다.
나는 그날 알았다.
포기하지 않는 것이 강함이 아니라,
포기해도 된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게
진짜 힘이라는 것을.
어쩌면 어른과 아이의 차이는
책임의 무게가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아이의 한마디는
늘 이렇게 나를 살려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