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기완을 만났다』, 조해진
어머니는 저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살아야 했습니다.
‘나’는 북한 이탈 주민 로기완이 인터뷰에서 남긴 이 문장을 읽은 후, 그를 만나 그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 브뤼셀로 떠난다. 브뤼셀로 떠나기 전, 방송작가인 '나'는 형편이 안 좋은 사람들의 사연을 미니 다큐로 만드는 일을 했었다. '나'는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인 윤주와 가까이 지내게 됐는데, 본인이 윤주의 신경섬유종 치료를 지연시킨 사이에 윤주의 종양이 악성종양으로 바뀌었다는 생각에 괴로워한다. 또 닥친 불행에 홀로 힘들어하는 윤주의 곁에 있어주기를 포기하고 브뤼셀로 도망치듯이 떠난 것이다.
'나'가 로기완을 찾아 나선 이유는 "누군가 나 때문에 죽거나 죽을 만큼 불행해졌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고작 사는 것, 그것뿐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어서, 로기완은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었던 건지 그에게 묻기 위해서다. 즉 본인이 살아야 한다면 왜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구하고 싶어서일 것이다.
가까운 사람이 본인 때문에 죽었다는 로기완을 보고, '나'는 그에게서 본인의 고통과 죄책감을 읽었을 것이다. 연민은 타인을 위하는 이타적인 정서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사실 모든 연민의 시작은 타인의 고통에서 본인의 고통을 발견하는 것이다. 본인의 삶에 비슷한 고통이 없다면, 혹은 앞으로의 삶에 비슷한 고통을 상상할 수 없다면, 타인에 대한 연민은 시작될 수 없을 것이다. 은연중에 비슷한 고통을 피하고 싶다는 생각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는 연민은 자기중심적인 정서이다.
그러나 '나'의 연민은 그 정도 수준에서 그치지 않는다. '나'는 로기완이 난민으로 브뤼셀에 정착하는 걸 물심양면 도왔던 박으로부터 로기완의 일기를 받는다. '나'는 로기완의 일기를 읽고 그의 행적을 그대로 따라다니며 그의 삶을 상상한다. 그가 방문했던 곳에 방문하고, 머물렀던 곳에 머무른다. 생활 자체를 겹치는 것이다. 때로 그가 무시나 폭력을 경험했던 곳에선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당사자가 아닌 애먼 사람들에게도 분노를 표출하기도 한다. '나'는 그 과정에서 그에게 얕은 연민을 느끼는 것을 거듭 경계한다. 자기만족적인 감정이 아닐지, 진심 없는 감정은 아닐지 끊임없이 의심한다.
'나'는 본인의 생활 자체를 그의 삶과 겹침으로써 그를 계속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비록 '나'의 연민은 스스로의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마음에서 출발했을지라도, 나와 비슷한 그의 고통을 넘어서 그의 삶의 여러 면면을 고스란히 이해하려는 몸부림으로 이어진다. 온전한 이해에 가닿을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타인의 삶에 최대한 가까워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할 때, 연민은 그 행위의 시작점으로서라도 가치 있는 역할을 수행한 게 아닐까?
소설은 '나'가 로기완의 행적을 그대로 따라가며 작성한 기록물이라는 형식을 취한다. 로기완을 물리적으로 만나는 장면은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노트에 적지 못한 남은 이야기'로 짧게 묘사될 뿐이다. 소설의 제목이 『로기완을 만났다』라는 걸 감안하면, 누군가와의 만남은 물리적인 만남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한 부단한 노력 자체도 타인을 진정으로 만나는 과정인 것이다.
이때 진정한 만남은 또 다른 만남을 낳는다. 소설에서 로기완의 삶을 이해하려는 '나'의 노력은 단순히 로기완과의 만남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로기완과의 만남이 있었기 때문에, 유사한 죄책감 속에서 살아가는 박의 인정(박은 '나'에게 로기완의 정보를 전달함으로써 그와의 만남을 주선한다)과 서울에서의 만남을 기약하게 된 윤주와의 대화도 가능해진 것이다.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증여의 가치"를 말한다. 로기완은 일기를 박에게 넘겼고, 박은 그 일기를 '나'에게 넘겼다. 그리고 그 일기를 따라 로기완과 삶을 겹치려고 한 '나'의 기록은 독자에게 소설로 전달된다. 삶을 겹치는 행위가 연민을 (최대한의) 이해로 옮겨보려는 노력이라면, 이 모든 과정은 삶의 내밀한 기록을 믿을 수 있는 누군가에게 열어 보이는 행위가 선행됐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들 사이의 신뢰와 연대가 계속 이어져, 더 많은 사람들과 이해로 연결되는 만남을 만든 것이다. 로기완과 박의 만남, 박과 '나'의 만남, 마침내 '나'와 로기완의 만남으로.
지극히 개인적이고 소중한 일기를 다른 이에게 전하는 그 마음에 담겨 있을 애정을 가늠해 본다. 그리고 그 애정에 깃든 수많은 만남의 가능성을 낙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