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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Mrs. Blue 0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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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njoo Doh Oct 13. 2024

여름 II

  찌는 듯한 무더위에 풀들은 모두 누렇게 변해갔고 막바지의 여름은 모든 사람들을 지치게 만들었다. 습한 날씨에 온몸은 하루종일 땀에 젖었고 숨이 막힐 만큼의 뜨거운 온도는 마을 사람들에게 의욕을 잃게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하늘에서는 갑자기 커다란 야구공만 한 우박이 후드득 쏟아지기 시작했다. 무더위에 지쳐 넋을 잃고 있던 미세스 블루는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커다란 우박은 모든 것들을 부숴버릴 듯이 무섭게 내렸다. 그러더니 거센 바람까지 휘몰아쳤다. 거리의 나무들은 뿌리째 뽑혀 휘청거리며 쓰러졌다. 병든 닭처럼 힘없이 늘어져 있던 한여름의 마을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온 세상이 회오리 속에 갇힌 듯 보였지만 “ Mrs. Blue” 가게 안은 그와 대조적으로 조용했다. 아랑곳없이 잠을 자는 맥스의 코 고는 소리만이 고요를 깨고 있었다. 그때, 문이 살짝 열리며 차가운 바람과 함께 한 여자가 들어섰다. 30대 후반이나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였다. 우박과 폭풍으로 흐트러진 머리카락만 아니면 첫인상은 아주 단아해 보였다. 외모와는 다르게 그녀의 얼굴은 어두운 잿빛으로 가득했다.


“ 안녕하세요, 미세스 블루 씨.

길을 걷다가 파란색 문이 눈에 띄어 처음 들어와 봤어요. ”


“ 안녕하세요, 잘 오셨어요. “

바깥이 지금 너무 어수선한데 일단은 좀 편안히 쉬세요.

제가 따뜻한 차를 좀 준비해 올게요.”


미세스 블루는 그녀의 잿빛 얼굴을 보자마자 먼저 따뜻한 차를 떠올렸다. 재빠르게 페퍼민트차를 만들어 단아한 여자 손님에게 천천히 마시라고 건네주었다. 손님은 의자에 앉아 한 모금 마시고는 조심스럽게 미세스 블루에게 물었다.


” 여기서는 무엇을 살 수 있나요? “


”아, 네.

이곳에서는 손님의 이야기를 듣고, 그에 맞는 상자를 드리고 있어요. 저에게 말씀하시는 모든 일들은 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아요. 무슨 얘기든 다 하셔도 돼요. 그러니까 걱정 마시고 편안하게 말씀해보세요.”


단아한 여자는 그제야 잿빛 얼굴에 서렸던 긴장을 풀고 미세스 블루에게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이들을 키우며 하루종일 일도 해야 하는 고단한 세 아이의 엄마였다. 지금도 자녀들은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아직은 그녀의 손길이 필요한 나이였다. 매일 엄마로서, 그리고 직장인으로서 해야 할 일들은 산더미였다. 아무리 완벽하게 해내도, 돌아서면 또 다른 일이 쌓여 있었다. 어렸던  아이들은 점점 자라났고 첫째와 둘째는 모든 생각과 행동이 돌변하는 사춘기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그동안 별문제 없이 이루어지던 아이들과의 소통은 갑자기 꽉 막혀버렸다.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아이들 뿐만 아니라 일하는 직장에서의 동료들과 상사와의 관계로 힘든 나날들을 보내야만 했다. 단아한 엄마 손님은 온통 신경 써야 할 일들로 머리 위에 수십 개의 안테나를 꼿꼿이 세운 듯 그저 힘든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가고 있었다.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의 학부모들 사이에서도 온갖 말들로 차고 넘쳤다. 집안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이나 학교 외에 밖에서 일어났던 아주 작은 아이들의 사소한 일들까지 모두 커다란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주변의 학부모인 엄마들의 입 속에서 나오는 말들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태풍이 되어 단아한 엄마를 덮칠 듯 무섭게 삼켜 버리고 있었다. 끝내 엄마 손님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일하던 직장을 뛰쳐나와 집어삼킬 듯 천둥소리를 내며 쏟아지는 우박과 거센 비바람을 맞으며 정신을 잃고 걷고 걷다가 “ Mrs. Blue “ 가게 앞에 오게 된 것이었다.


  미세스 블루는 모든 이야기를 마친 엄마 손님에게 다가가서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등을 쓸며 안아 주었다. 그러고는 다시 카운터 테이블로 와서는 서랍을 열어 키를 하나 꺼내 단아한 엄마 손님에게 건네주었다. 키를 가지고  지금 바로 가게 안에 있는 비상구 문을 열고 복도를 따라가라고 일러 주었다. 쭉 가다 보면 또 다른 작은 문 앞에 다다르는데 그때 그 키로 열고 들어가라고 했다.


 단아한 엄마 손님은 미세스 블루가 알려준 대로 키를 받아 곧장 뒤를 돌아서 비상구 문을 열고 들어갔다. 기다란 복도를 지나 막다른 곳에 도착하니 또 하나의 작은 문이 나타났다. 조심스레 키를 돌려 문을 열었다.


 그곳은 지하로 향하는 통로였고 점점 깊숙한 곳으로 내려갔다. 한참을 지나자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는 오로지 동물들만 살고 있는 비밀의 숲 속 세상이었다. 지상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갖가지 종류의 나무들과 꽃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곳을 유유히 거니는 크고 작은 동물들의 소리와 멋스러운 깃털옷을 입은 여러 새들의 각기 다른 소리들로 가득했다. 그것은 마치 최고의 연주를 들려주는 오케스트라처럼 아름다운 선율들로 온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비밀의 숲 속에서 한참 동안 넋을 놓고 빠져 있다가 보니 다람쥐 한 마리가 엄마 손님에게 다가왔다. 따라오라는 손짓을 하며 그녀를 앞서 걸었다. 조금 걷자 아주 작은 틈이 보였다. 겨우 한 사람이 걸어 들어갈 수 있을 만큼의 작은 공간이었다. 다람쥐는 그곳으로 들어가라는 손짓을 또 한 번 했다. 엄마 손님은 곧 몸을 숙여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조금 지나자 노란빛의 따뜻한 공간이었다. 딱 한 사람만이 다리를 쭉 펴고 앉을 수 있는 아늑하고 고요한 땅속 동굴이었다. 한쪽에는 따뜻한 차를 마실 수 있는 찻잔과 포트가 있는 작은 나무 테이블이 있었고 그 옆에는 버섯 스탠드가 은근히 퍼지는 빛을 비추고 있었다. 그녀는 다리를 편안히 쭉 펴서 앉고는 담요를 덮고 따뜻한 차를 마셨다. 그러자 그녀가 꼿꼿이 세우고 있던 머리 위의 안테나와 모든 일들과 말들, 생각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깨끗하게 사라져 버렸다. 단 한 번도 쉬지 못했던 그녀는 마침내 세상에서 가장 평온한 작은 동굴 안에서 오랫동안 쉴 수 있었다. 그곳은 그녀를 짓누르던 단 하나의 말소리도 존재하지 않는 자연의 소리만 가득했기 때문이다.  


지상에서 그 누구도 알아챌 수 없는 그 비밀 동굴은 미세스 블루의 피난처였다. 미세스 블루도 가끔씩 재빨리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곳으로 숨어야 했다. 그녀만의 비밀 공간을 기꺼이 엄마 손님에게 흔쾌히 내어 준 것이었다. 미세스 블루는 엄마 손님의 속이 새까맣게 타버려 더 이상 다시 생기를 되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모든 것을 잊은 채 편안하게 쉴만한 곳은 그곳 말고는 그 어떤 것도 없었다.



일러스트

Eunjoo Do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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