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끝자락, 거리의 나무들은 마지막 남은 잎들을 바람에 맡긴 채 쓸쓸히 버티고 있었다. 잎들이 떨어질 때마다 마을에 스며드는 적막은 미세스 블루의 마음속 깊은 고독과 닮아 있었다. 마치 모든 것이 멀어져 가는 듯 그녀를 감쌌고 차가운 공기 속에 남겨진 건 앙상한 가지들 뿐이었다. 마을은 더 쓸쓸해졌고 수확이 끝난 과실수들은 더 이상 생기를 자랑하지 못했다. 마을을 훨훨 날아다니던 철새들도 모두 따뜻한 남쪽으로 날아갔다. 곁에 있던 많은 것들이 하나둘씩 떠나버렸다.
가을비가 밤새 내리던 어느 깊은 밤 미세스 블루는 창문을 세게 두들기는 빗소리에 잠을 설쳤다. 피곤한 몸으로 아침을 맞이한 그녀는 한 번쯤은 그냥 지나칠 만도 한데 어김없이 빵을 구워 출근길에 나섰다. 두꺼운 외투를 입은 둘은 수확을 마쳐 휑한 들판길을 달려갔다.
가게에 도착한 미세스 블루는 썰렁한 가게 안을 서둘러 훈훈하게 만드느라 분주했다. 갓 구운 빵을 식지 않게 포장해 가져온 덕분에 빵에서는 여전히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고 미세스 블루는 서랍에서 초를 꺼내 카운터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불을 붙였다. 곧 가게 안의 모든 공간은 노란 불빛의 따뜻한 온기로 채워졌다.
늦가을의 낮은 점점 짧아져 문 닫을 시간이 되면 밖은 벌써 어둑해져 있었다. 미세스 블루가 서둘러 문을 닫으려고 정리를 하려고 하는 찰나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을 보아서는 5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중년 여자였다. 꽤나 추운 날씨였는데도 목이 훤히 드러난 옷차림이었다. 어딘가 모르게 쓸쓸한 모습을 미세스 블루는 그녀에게서 볼 수 있었다.
“ 미세스 블루 씨, 제가 너무 늦게 왔죠?”
미세스 블루는 아니라는 듯 손을 몇 번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에요, 원래 이맘때쯤엔 조금 일찍 마무리할 뿐이에요. 오늘 날씨가 많이 추워졌네요. 괜찮으세요?”
“네, 괜찮아요… 그냥, 요즘… 문득 모든 것이 너무 차갑게 느껴져요.”
미세스 블루는 몹시 춥고 쓸쓸해하는 그녀에게 차 한잔을 건네며 중년 여인의 눈을 바라봤다. 그 눈 속에는 오랜 시간 묻어둔 그녀의 슬픔이 흐르고 있었다.
같은 마을에 살고 있던 사람이었는데도 미세스 블루는 그때서야 그녀를 처음 만났다. 고운 얼굴이었지만 고된 일을 많이 한 탓이었는지 얼굴에는 짙은 주름들이 깊이 패어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인상은 참 선했다. 선한 중년의 손님은 천천히 입으로 불어가며 따뜻한 율무차를 마셨고 몸이 어느 정도 녹은 후에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결혼을 했고 곧 자녀들을 연이어 낳았다. 젊은 시절 하고 싶었던 일들은 결혼과 동시에 모두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렸다. 오로지 아이들을 키우며 살림살이뿐만 아니라 생계를 위해 일까지 해야 했다. 마치 눈가리개를 한 오로지 앞만을 바라보며 달리는 경주마와 같았다. 다른 어떤 곳에 시선을 둘 수도 없었고 좁은 시야로 맹렬하게 살아내야 했다. 선한 중년의 여인에게 허락된 세계는 단지 끝없이 펼쳐진 좁은 직선뿐이었다. 고독하면서도 필사적인 질주였다. 그녀는 젊은 때 꿈이 있었지만 살아가는 동안 그 꿈이 무엇이었는지조차 잊혀 버렸다. 몇십 년 동안 그녀는 자신을 모두 잃어버린 채 살고 있었다.
그동안 온 힘을 다해 키운 자녀들은 모두 잘 성장을 했고 이제 모두 성인이 되어 그녀 곁을 떠나갔다. 선한 중년의 여인 곁엔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매일 빈 집에 들어설 때마다 숨조차 쉴 수 없을 만큼 깊은 고독에 잠겼다. 떠난 자녀들의 흔적은 남아 있었지만 그들의 행복했던 웃음소리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마치 무거운 그림자가 그녀를 덮친 듯 아무리 몸을 일으키려 해도 마음은 한 곳에 묶여 있었다. 그녀는 빈 집안의 정적 속에서 더 깊은 어둠에 잠겼다. 텅 빈 흔적들이 마음을 짓눌렀고 자식들이 떠난 이후 매일이 겨울처럼 차가웠다. 그녀는 또한 자유의 시간이 왔음에도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고 공허함만이 그녀의 온마음을 사로잡았다.
미세스 블루는 그녀가 차분히 얘기를 들려줄 때 점점 가슴속 깊이 뜨거운 무엇인가가 차오르는 듯 슬픔에 빠졌다. 그럼에도 슬픈 기색 없이 그녀에게 상자 하나를 꺼내와 내밀었다.
선한 중년의 여인은 한 번도 Mrs. Blue 가게에 와보지 않았기 때문에 상자를 살 그 어떤 것도 들고 오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망설이자 미세스 블루는 괜찮다는 말과 함께 그녀의 두 손을 꼭 잡아주고는 갈색 상자를 건네 주었다. 미세스 블루는 그녀에게 안에 든 것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지 일러주었고 카운터 테이블 위 꽃병에 든 아네모네꽃 한 송이를 꺼내 함께 주었다.
선한 중년의 여인은 상자와 꽃을 들고 캄캄한 밤길을 걸어 집에 도착했다. 그리고 집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손에 들고 있던 꽃에서 잎 하나를 땄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꽃잎을 조심스럽게 문질렀다. 그리고 곧바로 상자를 열어 작은 유리병에 든 오일 두 방울을 꽃잎 위에 떨어뜨렸다. 그러자 조금의 시간이 흐른 뒤에 미세스 블루가 말해준 대로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 절대 놀라지 말고 문을 가만히 열어주라고 했던 미세스 블루의 말이 생각났다. 그녀는 작은 숨을 한번 고르고는 문을 천천히 열어 주었다.
문을 열자 몸집이 거대한 곰이 기다리며 서 있었다. 곰은 한 손에 커다란 풍선만 한 노란 불빛의 조명을 들고 있었다. 곰이 한 발자국 떼어 집 안으로 들어오자 문은 스르르 닫혔고 곰은 아무 말 없이 선한 중년의 여인을 꼭 안아주었다. 그녀는 곰에 안기자마자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곰은 아무 말 없이 계속 그녀를 안아 주었고 곰도 함께 눈물을 흘렸다. 거대한 곰의 손이 그녀의 등을 쓰다듬자 얼어붙었던 그녀의 마음이 서서히 녹아내렸다. 곰은 이미 그녀의 지나온 모든 삶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알고 있었다. 그녀가 젊은 시절부터 중년이 될 때까지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어떤 고통과 슬픔이 있었는지, 얼마만큼 고독한지 모든 것들에 대해 이해하고 있었다.
곰을 만난 이후로 중년의 여인은 자신이 무엇을 좋아했는지도 다시 깨달았고 잃어버린 자신의 꿈도 되찾았다. 곰이 항상 곁에서 환한 조명을 비춰주는 덕분에 더 이상 우울해하지도 않았다. 그녀 곁엔 언제나 커다란 곰이 버팀목처럼 지켜주었다. 선한 중년의 여인은 다시 새롭게 되찾은 생기로 하루하루 소중한 시간들을 채워나갔다.
일러스트
Eunjoo Do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