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Mrs. Blue 13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unjoo Doh Oct 13. 2024

겨울 II

  마을에 첫눈이 펑펑 내리고 난 후 두 차례 더 눈이 내렸다. 기온은 뚝 떨어졌고 쌓인 눈들은 얼어붙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두꺼운 외투를 입고 쌓여있는 눈을 치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미세스 블루는 아침부터 가게 앞에 쌓인 눈을 조심스럽게 쓸어내고 있었다. 그때 저만치에서 천천히 보행보조기를 끌며 걸어오는 할머니를 보았다. 미세스 블루는 빗자루를 잠시 내려놓고 천천히 할머니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세차게 부는 바람은 할머니의 얼굴을 때렸고 발 밑의 얼음에 미끄러질 듯 아슬아슬해 보였다. 할머니는 미세스 블루를 보며 반가운 듯 웃고 계셨다.


"가게에 들어가시려던 길이었나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미세스 블루는 살짝 웃으며 할머니의 팔을 부축했다. 할머니는 잠시 숨을 고르고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요, 여기 오고 싶었어요. 손이 많이 가겠지만 부탁 좀 해도 될까요?"


그 말에 미세스 블루는 천천히 보행보조기를 같이 끌며 할머니와 함께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 할머니, 여기 의자에 앉아 쉬세요.

이렇게 춥고 길이 미끄러운 날 어떻게 나오셨어요.

제가 얼른 따뜻한 유자차를 만들어 올게요. “


그녀는 달큼한 향이 나는 유자차를 얼른 만들어 할머니께 드렸다. 등이 굽고 체구가 작은 할머니는 작은 손으로 컵을 들고서 얼굴에 모락모락 피어올라 닿는 김을 호호 불어가며 천천히 마셨다.


” 차 향이 너무 좋아요, 미세스 블루 씨.

여기 이 가게에 무사히 도착해서 이제 좀 마음이 놓여요.”


할머니는 깊은 안도의 숨을 내쉬고는 그녀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할머니의 몸은 올해부터 갑작스럽게 많이 변하기 시작했다. 그나마 남아있던 기운도 거의 사라졌고 희미하게 기억하던 사랑하는 사람들도 점점 머릿속에서 새하얗게 잊어버리기 시작했다. 혼자 생활하던 할머니는 부엌일이나 정원의 일 등 모든 일상에서 더 이상 버티기 힘든 상황에 다다른 것이었다. 스스로 무슨 예견이라도 한 듯 이젠 하나하나씩 주위를 정리하고 계셨다. 혼자 꾸려나가던 살림들도 거의 정리하셨고 살고 계시던 집도 내놓으셨다고 했다. 그런데 딱 한 가지만을 못하고 있었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할머니의 마음은 점점 급해졌다. 더 이상 가만히 기다릴 수가 없어 길이 꽁꽁 얼어붙었는데도 힘겹게 걸어서 “ Mrs. Blue ” 가게를 찾아오신 것이었다. 추운 겨울이 지나가기 전에 모두 깨끗이 정리하고 싶으셨기 때문이었다.


 죽기 전에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꼭 전해주고 싶은 말들이 있는데 그들이 사는 주소도 모르고 어떻게 전해야 할지 도저히 방법을 모르겠다며 미세스 블루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녀는 할머니의 간절한 마음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마음이 아파온 미세스  블루는 마음속으로 눈물을 흘리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할머니, 아마도 벌써 할머니를 아는 많은 사람들이 할머니의 간절한 마음을 알 것만 같아요. 그러니 너무 조급해하지 않으셔도 돼요. “


그녀는 할머니를 안심시키며 할머니에게 필요한 상자가 무엇일까 고민했다. 그러고는 생각이 났는지 일어나 사다리를 찾아 올라가 높이 있던 하얀색 상자를 꺼냈다. 할머니에게 상자를 드리고는 천천히 자세하게 말씀드렸다.


미세스 블루는 또다시 얼어붙은 길을 혼자 걸어야 하는 할머니가 걱정스러워 같이 할머니댁으로 모셔다 드리기로 했다. 가게는 맥스에게 부탁하고 그녀는 상자를 할머니의 보행보조기 밑의 수납함에 넣고는 할머니를 부축하고 천천히 길을 걸어 할머니 집으로  무사히 모셔다 드렸다.


미세스 블루가 할머니께 드린 상자 안에는 여러 색의 카드들이 들어있었다. 할머니가 전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모두 줄 수 있을 만큼이었다. 할머니는 전하고 싶은 모든 말들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정성스럽게 또박또박 써 내려갔다. 그 다음날이되어 할머니는 미세스 블루가 일러준대로 다 쓴 카드들을 가지고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몇 분이 흐르자 맥스가 할머니 집 앞에 살며시 나타났다. 할머니는 맥스의 다정한 눈빛을 보며 이내 미소를 지었다. 말없이 맥스의 뒤를 따라 나선 할머니는 맥스가 이끄는 대로 걸었다. 그들의 발걸음이 가벼워질수록 바람이 부드럽게 불기 시작했고, 할머니는 고요한 마음으로 길을 걸었다.


 할머니와 맥스가 다다른 곳은 드넓은 바닷가였다. 그곳에는 작은 배 한 척이 기다리고 있었다. 배는 마치 그들을 오랫동안 기다린 듯, 잔잔한 물 위에서 살며시 흔들리고 있었다. 맥스는 할머니를 배로 인도했고, 할머니가 배에 오르자 맥스가 다시 한 번 바람을 일으켰다. 그 바람은 돛을 부드럽게 감싸며 배를 앞으로 밀어주었다. 배는 점점 더 멀어졌고, 할머니는 평온한 마음으로 바다를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그러자 저 멀리서 커다란 새 한 마리가 날개 짓을 하며 배 쪽으로 향해 날아왔다. 새는 큰 부리로 배 안에 가득 찬 카드를 하나씩 물더니 곧 재빠르게 날아 카드를 받을 사람 집의 우체통에 정확하게 갖다 놓았다. 그렇게 모든 카드들이 배달되는 동안 바다는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황혼의 물결로 넘실댔다. 할머니는 부지런히 카드를 물고 날아가는 새를 눈을 떼지 못하고 끝까지 바라보았다. 살아있는 동안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소중한 말들을 떠나기 전 모두 전할 수 있음에 감사하며 안도의 눈물을 흘렸다.


모든 카드들이 각자의 주인에게 도착했고 할머니의 집은 차츰 비워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는 평온한 얼굴로 조용히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그녀의 긴 여정은 이제 끝났고 남은 사람들은 할머니의 따뜻한 마음을 오래도록 간직하게 되었다.



일러스트

Eunjoo Doh










이전 12화 겨울 I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