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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삶력의 본질은 ‘모순을 품고, 나로 사는 힘’

역주행 도서, 양귀자의 <모순>이 이야기하는 삶

by 야인 한유화

어엿한 세대주로 등록된 1인 가구. 생활비도 혼자 감당하고, 명의도 전부 내 이름이다. 겉으로 보기엔 충분히 ‘독립된 어른’이다.


그런데도 명절이면 가족은 묻는다. “이번에도 안 올 거니?” “그래도 결혼은 해야지, 외롭잖아.”
이 질문들 앞에서 자문하게 된다.
“나는 혼자 사는데, 왜 내 인생은 아직도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닐까?”


1인 가구가 되었어도, 삶의 명의는 온전히 내 것이 아닌 듯하다. 혼자 밥도 잘 챙겨 먹고, 즐겁게 잘 지낸다고 해서 어엿한 ‘혼삶러’가 되는 건 아닌 모양이다.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꾸려가는 ‘1인 가정의 가장’이 된다는 것은, 가족에게 부여된 ‘역할’로부터 이탈해 나라는 존재를 새롭게 정의하는 내면의 긴 여정이다.







우리는 모두 가족 안에서 어떤 역할을 맡아 살아왔다. 장녀, 막내, 책임감 있는 딸, 또는 기대에 못 미친 자식. 그 역할들은 계약 기간도, 퇴사도 없다.


집을 나와 독립해도 ‘딸’이라는 이름표는 여전히 따라붙는다. 내가 아무리 잘 살아도 엄마에게 나는 여전히 ‘결혼해야 할 딸’이고, 친척들에게는 ‘가족 행사에 빠진 문제적 1인’일 수 있다. 가족은 종종 ‘나’ 자체보다, 그 역할의 공백에 더 민감하게 관심을 기울이기도 하지 않는가.
혼자 잘 산다는 것은 그런 역할 기대를 무시하거나 파괴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가족의 서사와 내 서사를 분리하고, 정서적 거리를 재조정하는 감정의 기술이다.


거리를 두는 것은 단절이 아니다. 그저 나를 과잉 설명하지 않고 살게 해주는 필수 훈련일 뿐이다. 그 거리를 지키면서도 지나친 거리감에 미안함을 느끼지 않기 위한 균형 감각. 그것이 바로 ‘혼삶력’의 핵심이다.


삶에 대한 자신의 선택이 타인에게 납득되지 않더라도 조용히, 그러나 꾸준히 살아내는 일이다. 진짜 혼삶력은 그 삶이 내 인생임을 스스로 승인하는 힘이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지만, 어머니에게는 딸의 인생이기도 하다.” 양귀자의 소설 《모순》에서 주인공이 던지는 이 말을 듣고 갑갑한 마음과 묵직한 울림이 함께 다가왔다.


이 책이 20년 넘게 사랑받고, 최근 MZ세대에게 다시 주목받는 이유는 분명하다. 《모순》은 가족과 사회, 연애와 자기 자신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모순을 거침없이 그린다. 주인공 안진진은 요즘의 젊은 세대의 관점에서는 ‘답답하기도 하고 속물스러운 사람’으로 볼 수도 있다. 폭력과 착취에 익숙해져 버린 딸로서, 누나로서만 살아가는 인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사랑과 현실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면서도, 모순 그 자체를 외면하지 않고 껴안으며 자신의 길을 걸어간다. 독자들 각자가 겪는 갈등과 무력감, 가족의 기대와 나의 선택 사이의 간극을 솔직히 드러내고 받아들이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많은 이들의 공감을 끌어낸다.


《모순》은 완벽한 답을 주지 않는다. 삶의 불완전함과 모순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말한다. 혼삶이라는 선택에 대해 모두를 설득할 수 있을 만한 멋진 답변을 갖고 살아가려 했던 나에게, 모순 그 자체를 받아들이며 살아가라는 이 책의 메시지는 새로운 관점을 보여줬다.


사랑하는 사람과 멀어지고, 가족과 부딪히고, 내가 선택한 삶을 스스로 설명하지 못할 때도 있지만 그럴 때마다 이 책은 이야기한다. “삶은 탐구하는 것이기에, 모순을 품고, 나 자신으로 살아가는 힘을 기르라.”라고 말이다.


‘혼삶’은 단순히 혼자 살아가는 기술이 아니다. 내가 어떤 모순적 존재인지, 어떤 관계 속에 묶여 있는지, 그걸 온전히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내면의 힘이다.







실제로 여러 역할이 충돌하고, 수없이 많은 모순적인 상황을 겪는 것이 인생이다. 가족 안에서 스스로의 역할을 단칼에 분리해 내고 ‘탈가족’을 이루거나, 단순히 거리감을 확보하는 것이 혼삶력의 전부는 아니다.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은 그 모순 속에서도 내가 ‘나’ 임을 놓지 않고, 그 안에서 스스로를 인정하며 살아가는 태도다.


가족의 기대와 나의 선택이 충돌할 때, 어쩔 수 없이 그 안에서 부딪히고 상처받을 때, 모순된 감정과 역할이 뒤섞여 힘들 때, 혼삶력이란 그 복잡한 현실을 부정하지 않고, 그 속에서 나만의 삶을 조용히 지키는 힘이다. 그것이 혼삶력의 진짜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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