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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워서 봤는데도 기 빨리는 영화 엄선작

<아노라>, <RRR>, <언컷젬스>

by 신거니
*각 작품에 대한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MBTI 검사에서 순도 99% "I(내향인)" 성향이 나오는 나에게 사람과의 만남은 일정한 '기빨림'을 전제로 한다. 그러니 어차피 기가 빨릴 거, 즐겁게 빨리자(?)는 철학을 가지고 살아간다. 가까운 몇 명과 깊은 관계를 유지한다든지, 평소 좋아하는 주제로 얘기를 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영화도 그중 하나다.


다만 같이 얘기할 사람을 만나기도 전부터 내면의 에너지를 쭉쭉 뽑아가는 작품이 있다. 온몸에 힘을 꽉 주고 봐야 하는 공포영화도 그렇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사례는 얼마든 있다. 그리고 그런 영화를 접하다 보니 기빨림에도 유형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노라> 관객의 시선을 가만 놔두질 않는 폭발 같은 대사


포스터만 보면 전형적인 '연상연하 신데렐라 스토리'를 예상하고 들어갔다가, 신데렐라가 유리구두를 깨서 거칠게 휘두르는듯한 템포로 진행된다. 러닝타임 초반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섹스 및 마약 및 파티 등등의 시퀀스(여기서 이미 에너지의 반을 소비했다)도 그렇지만, 이 작품은 중반에 하수인들이 찾아오는 순간부터 찐 페이스로 달려 나가기 시작한다. 개인적으로는 전반부의 19금 신을 덜어내고 변곡점에 해당하는 부분을 빠르게 시작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마치 <기생충>에서 이정은 배우가 초인종을 누르면서부터 이야기의 뒤틀림을 맞이하듯, 이 작품도 거칠게 문을 두드리는 하수인들이 등장하면서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아노라를 지켜줘야 할 남친 반야는 도망가버리고, 하수인들은 결혼을 무르라며 윽박지르고(라스베이거스에서 졸속으로 하고 왔음), 아노라는 마치 한 마리의 맹수처럼 온갖 욕설과 폭력으로 깃을 잔뜩 세운다. 그 모든 아이러니와 혼돈 속에서 미친듯한 웃음이 터져 나오는데, PTA의 <펀치 드렁크 러브>만큼이나 시원하게 웃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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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처럼 지나가는 전반부를 지나 후반부로 진행될수록 영화의 톤은 점차로 차분해진다. 주제의식은 그 차분함 사이에서 씁쓸하게 고개를 내민다. 그러다 결말 부분에 이르게 되면, 눈 내리는 차 안에서의 나지막한 울음소리, 그리고 와이퍼 소리와 함께 끝이 난다. 이제 더 이상 소진할 에너지가 없는 듯 한껏 가라앉은 아노리의 모습은 곧 나의 모습이기도 했다.


이 영화의 킬 포인트는 주인공의 폭발하는 연기다. 단순히 화를 내는 걸 넘어 대사를 물리적으로 휘두르는 듯한 찰진 토크가 일품이다. 그리고 이는 (내겐 투머치 였던) 19금 신과 함께 기가 제대로 빨리는 1등 공신이기도 하다. 자신이 파티 피플이라면 조금 더 부드럽게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내겐 목구멍을 따라 퍼지는 독하디 독한 양주 같았다.


<RRR> 시속 300km로 질주하는 코끼리를 타고 하늘을 나는 기분


보통 서사의 밀도와 속도는 반비례한다. 극단적으로 보면 원테이크로 찍은 작품(가령 <1917>이나 <소년의 시간> 같은)의 경우 컷을 자를 수 없기에 슬로모션을 제외하면 가장 느린 속도와 높은 밀도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건 평범한(?) 케이스에서나 적용되는 공식이다. 발리우드 무비의 극치를 보여주는 <RRR>은 그 거창한 이름(RISE! ROAR!! REBOLT!!!)만큼이나 비범한 전개를 보여준다. 즉 이야기의 밀도와 속도를 동시에 극한으로 끌고 간다.


이 영화는 3시간이 넘는 러닝타임과 더불어 볼거리가 가득하다. 러브 스토리와, 과장된 영웅 서사와, 물리법칙을 깨부수는 액션과, 호랑이 서커스와, 역사적인 설움과, <무간도>급의 배신 스토리와, 인도 영화 특유의 뮤지컬(마살라)과, 심지어 댄스 배틀까지 있다. 똑같은 돈을 내고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다면, 경우에 따라서는 하주 '혜자'라고 칭찬할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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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봤을 때에는 경악을 금치 못했지만 어느새 "Do you know, 나뚜?"(댄스 배틀 신청 대사)를 입버릇처럼 내뱉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고, 무엇보다 인도가 자신의 국가적 자존감을 최대한 끌어올린 영화라는 걸 고려하고 나니 묘한 짠함이 몰려오기도 했다. 지독한 영국 식민지배를 견뎌내며 쌓인 국가적 분노를 이런 식으로라도 해소할 수 있다면, 이런 오버스러운 서사에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언컷젬스> 아담 샌들러의 쉴 새 없는 토크 사이를 메우는 불협의 배경음


주인공의 대사가 극을 끌어간다면, 배경음은 극의 배경을 탄탄하게 구축한다. 배경음을 최소화하며 건조함을 배가시키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든지, 특유의 피아노음으로 긴박감을 주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같은 작품도 있다. 이 작품, <언컷젬스>는 아담 샌들러의 대사 뒤쪽에 계속 얹어지는 거슬리는 배경음이 사람의 정신을 쏙 하고 빼놓는다. 그리고 그가 쌓아 올린 거짓의 카드성이 얼마나 높아질 수 있는지, 그게 어떤 낙차를 가지고 땅바닥에 철푸덕 엎어지는지 보게 한다.


스불재(스스로 불러온 재앙)라는 말이 있다. 넥스트의 <Lazenca, Save Us>라는 노래 가사에서 온 밈으로, 하워드의 상황을 투명하게 비유한다. 그는 마치 보석의 마력에 홀린 듯 최악의 선택을 일삼는데, 잠깐의 행운마저도 불행으로 치환하는 놀라운 재주를 선보인다. 작품 전반에 흐르는 정신없는 분위기와 더불어 자신의 힘으로는 멈추기 힘든 폭주기관차처럼 절벽을 향해 달려 나간다.


개인적으로는 앞에서도 언급한 <펀치 드렁크 러브>와 더불어 아담 샌들러의 최고작이라고 생각한다. 보통 로맨틱 코미디나 혹은 순수 코미디 장르에서 소비되었던 이미지와는 다른 면모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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