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정, 관계, 문화>에 따르면 감정에는 두 가지 운영체제가 존재한다. 마치 윈도우와 맥OS처럼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시스템이다.
MINE 모형
Mental: 정신적, 개인 내면의 현상
Inside: 개인 안에서 일어나는 일
Natural: 인간 본성에 근거한 보편적 감정
Essentialist: 본질주의적, 변하지 않는 감정의 핵심
OURS 모형
Outside: 개인 밖에서, 관계에서 발생
Utility: 사회적 효용성 중심
Relational: 관계적, 타인과의 상호작용에서 생성
Situated: 상황과 맥락에 따라 달라짐
보통 WEIRD 문화권(서양의, 교육율이 높은, 산업화된, 부유한, 민주적인)은 MINE 모형을 따른다. 반면 동아시아권은 OURS 모형을 따르는 경향이 있다.
픽사의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을 보면 이해가 쉽다. 주인공 라일리의 머릿속에서 기쁨이, 슬픔이, 분노 등 다섯 감정이 경쟁하며 그녀를 조종한다. 이는 전형적인 MINE 모형이다. 감정은 개인 내면의 것이고, 나만의 고유한 경험이며, 남의 간섭을 받지 않는 영역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반면 동아시아권 문화는 조금 다르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일본 여자축구팀이 패배하고 나리타공항에 도착했다. "다른 선수들 반응은 어떤가요?"라며 기자가 묻자 선수는 이렇게 답했다.
"우리는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공항에 내리니 많은 분이 '잘했다!'고 외쳐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 따뜻한 격려를 들으니 큰 위로가 되면서도, 경기에 이기지 못해 정말 송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같은 상황에서 미국 선수라면 아마도 "I'm disappointed but proud of my effort(실망스럽지만 최선을 다한 것에 자부심을 느낍니다)"라고 답했을 것이다. 일본 선수는 '우리'로 시작해서 '다른 사람들의 감정'으로 끝맺었다.
교토대학교 심리학자 우치다 유키코의 연구는 두 문화권의 차이를 더욱 명확하게 보여준다. 연구진은 일본 학생과 미국 학생에게 우승한 선수의 사진을 보여줬다. 하나는 선수 혼자 찍은 사진이었고, 다른 하나는 동료 선수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일본 학생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는 우승자 사진에서 '더 풍부한 감정'을 봤다
미국 학생들: 혼자 있는 우승자 사진에서 더 강한 감정을 느꼈다
같은 상황, 같은 감정이라도 문화에 따라 완전히 다르게 인식되는 결과는 놀랍다.
만약 팀 프로젝트에서 당신의 아이디어가 채택되어 큰 성과를 거두었을 때 두 가지 운영체제의 답변은 이러할 것이다.
(MINE): "제 아이디어가 성공했네요! 정말 뿌듯합니다."
(OURS): "팀워크가 좋아서 가능했습니다. 모두 고생하셨어요."
WEIRD 문화권에서는 OURS모형의 답변에 대해 "재는 자신감이 없다"라고 느낄 수 있고, 동아시아 문화권 동료들 앞에서 MINE 모형의 답변에 대해서는 "너무 자만하는 것 아냐?"이라 느낄 수 있다.
이 책의 저자는 WEIRD 문화권인 저자로서 자신에게 익숙한 MINE모형보다 OURS모형을 설명하는데 더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반면 OURS 모형에 익숙한 나로서는 MINE 모형에 더 관심이 많았다.
OURS 문화권에서 자란 나는 그 시스템의 한계에 대해 알고 있었다. 예컨대 집단에 의해 내 감정이 좌우되는 것, 집단 압력에 휘둘려 진짜 궁금한 것도 질문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반면 MINE 모형의 자유로움이 부러웠다. "나는 어떻게 생각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용기. 다른 사람 눈치 보지 않고 솔직하게 내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능력 말이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더 좋은 걸까? 정답은 '둘 다 필요하다'이다. 이 두 가지 모드를 적절히 융화시킬 필요가 있다. 작가가 책 말미에 이야기했던 바로 감정 왈츠를 배우는 것이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제가 많이 성장했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결과를 도출해낸 제가 매우 만족합니다"
"우리 가족이 자랑스러워할 것 같아"
"친구들이 축하해줘서 더 기뻐"
둘 이상의 문화권을 자주 넘나드는 이중문화인들은 이미 이 기술을 터득했다. 왈츠 음악이 흐르면 왈츠를, 탱고 음악이 들리면 탱고를 추듯이 상황에 따라 감정 모드를 자연스럽게 전환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이 두 가지 모드에 익숙해야 하는 것은 문화권이 서로 다른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에서도 중요하지만, 앞으로의 AI 시대에 서비스를 구축하는데도 분명 고려해야 할 요소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AI 번역기술이 발달하면서 언어 장벽은 낮아졌지만, 감정의 벽은 오히려 높아졌다. 화상회의에서 한국인의 겸손한 표현이 AI 번역을 거쳐 "I lack confidence"로 번역되는 순간, 문화적 오해가 시작된다. AI가 한국인의 �를 '당황'으로 해석하지만, 실제로는 '겸손한 기쁨'일 수 있다. 그러나 절대적으로 많은 서구식 데이터로 학습한 AI는 이러한 감정 표현을 '비정상'이나 '소극적'으로 분류할 수도 있다. 한국인이 성과 발표에서 "저희 팀 덕분입니다"라고 말하면, AI는 이를 '낮은 자신감'으로 분석할 확률이 높다. 반면 미국인이 "This is my breakthrough idea!"라고 말하면 '높은 자신감'으로 분류할 수도 있다.
가상현실과 메타버스가 일상화된다면 서구인이 자신감을 표현하기 위해 아바타의 가슴을 펴고 턱을 들면, 동아시아인에게는 '오만한' 태도로 비칠 수 있다. 반대로 동아시아인이 겸손함을 표현하기 위해 아바타가 고개를 숙이면, 서구인에게는 '자신감 없음'으로 해석될 수 있음을 고려해야할지도 모른다.
요즘 AI 시대에 내가 강력하게 느끼고 있는 바 중 하나는 이것이다. 애플에 기획적 요소를 담당했던 스티브 잡스와 기술적 영역을 담당했던 스티브 워즈니악 두 사람 중에서 AI는 스티브 워즈니악과 비슷하다. 이전에 내가 접할 수 없었던 기술적 영역의 진입장벽을 극단적으로 낮추어 주었다. 그러나 미래의 비즈니스에서 여전히 스티브 잡스는 필요하다. 인간의 감정을 파고들고 의미를 부여하는 기획자 말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두 가지 감정 운영체제를 모두 익혀 상황에 맞게 전환할 수 있을 때, 개인적으로도 비즈니스적으로도 유리한 영역에 설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