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것에 속지 않는 법
2000년 전, 로마의 웅변가 키케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지어냈다.
신에게 예배를 드림으로써 난파선에서 살아남았다는 그림을 한 무신론자가 보게 되었다. 그림의 목적은 분명했다. 기도가 우리를 익사로부터 구해준다는 교훈을 전하려는 것이었다.
무신론자는 이렇게 물었다.
"그런데, 기도하고도 빠져 죽은 사람의 그림은 어디 있소?"
기도를 올렸는데도 빠져 죽은 사람들은 바다 밑에 있다. 자신들의 고난을 보여주기 어려웠던 것이다.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는 《블랙 스완》에서 이것을 '말 없는 증거'라고 부른다. 간단하지만 의미심장하고 보편적인 뜻을 담고 있다. 대부분의 사상가들은 자신들 이전에 나타났던 사람들을 조롱했지만, 키케로는 자신보다 후대에 올 사람들, 게다가 오늘날의 사람들까지 꼬집었다.
만약 고대에 눈부시게 번창한 목조 문명과 석조 문명이 있었다면, 후대에 전해질 가능성이 높은 것은 석조 문명이다. 단 한 번의 대화재이면 목조 문명의 증거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말 없는 증거'는 역사를 말할 때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그 어떤 영역에서든 사례를 수집하고 증거를 모으는 방식에서 일어난다.
백만장자를 분석하는 수많은 시도들을 보자. 먼저 성공한 사람들을 찾은 후 이들의 공통된 특징을 분석한다. 이렇게 해서 추출된 거물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용기" "리스크를 짊어지고 행동하기" 그리고 "낙관주의" 등등
이제 묘지 쪽으로 시선을 돌려보자.
실패한 사람들이 회고록을 쓰기란 어려운 일이다. 설사 원고를 썼다 해도 어느 출판인도 전화 한 통 걸어주지 않을 것이다. 성공담보다도 훨씬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해도, 패배자의 이야기를 돈 주고 살 독자는 없다.
무덤을 생각해보자. 실패자들의 묘지에도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차고 넘치게 묻혀 있다.
"용기" "리스크를 짊어지고 행동하기" 그리고 "낙관주의" 등등
백만장자들과 똑같지 않은가?
두 부류를 가르는 진정한 차이는 개인의 자질이 아니라, 어쩌면 잔인할 만큼의 '행운' 뿐이다.
'말 없는 증거'의 문제는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고 위험을 평가하는 방식 자체를 왜곡하기도 한다.
2001년 9.11 테러를 생각해보자. 테러의 직접적인 희생자는 약 2,500명이었다. 전 세계가 애도했고, 유가족들은 각종 지원을 받았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비극 뒤에는 '조용한 죽음'들이 있었다.
연구에 따르면 테러 직후 3개월간, 비행기 대신 자동차를 선택한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교통사고 사망자가 평년보다 약 1,000명이나 급증했다. 도로가 하늘보다 훨씬 위험한 곳이 되었지만, 아무도 이 죽음을 테러와 연결 짓지 않았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결과에만 환호하거나 분노한다. 정부나 기업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무엇을 해냈는지"는 홍보하기 쉽지만, "우리가 어떤 최악의 상황을 예방했는지"는 증명하기 어렵다. 예방된 재난은 일어나지 않은 사건이며, 곧 '말 없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키케로의 무신론자가 던진 질문은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하다. 우리는 화려한 성공담과 눈에 보이는 사건들 앞에서 끊임없이 되물어야 한다.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라앉은 진실은 어디에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