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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암산할 수 있을까?

책 <구술문화와 문자문화>

by Nova B

언어와 관련된 우리의 능력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듣기와 말하기, 읽기와 쓰기이다. 네 가지 능력을 또 다시 구분해보자면 듣기와 말하기는 우리가 가진 선천적인 능력이며, 읽기와 쓰기는 문자라는 인류의 위대한 발명품으로부터 탄생한 후천적인 능력이다.


현재의 우리는 언어와 문자를 떼어놓고 생각하기 어렵다. 문자가 없던 시절의 구술 문화에서는 무엇인가를 찾아서 읽어본다는 표현은 아무 의미없는 말이다. 그들에게 언어란 소리였다. 소리는 발화되는 순간 사라져가는 일시적인 것이다. 구술 문화 속에서 어떤 사람이 복잡한 문제를 단 몇 백 단어로 정리한 문장으로 정리했다고 해보자. 문자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해답을 기록할 수 없었고, 동일한 문제에 봉착했을 때 사고과정을 재현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구술 문화에서는 기억하기 쉽고 말하기 쉬운 방식의 패턴을 사용했다. 예를 들어 리듬을 가진 문장, 반복적이거나 대비되는 표현, 다양한 형용구나 정형구의 사용과 특이한 형태로의 기술들은 기억을 돕는 수단이었다.


문자로 기록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구술 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았던 두에판 성서를 보면 'and'가 빈번하게 사용되며, 다양한 형용구를 관찰해볼 수 있다.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heaven and earth. And the earth was void and empty, and darkness was upon the face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over the waters. And God said: Be light was made. And God saw the light that it was good; and he divided the light from the darkness. And he called the light Day, and the darkness Night; and there was evening and morning one day.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은 위에 있고 하나님의 정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둠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쓰기와 인쇄 문화가 발전한 문자 문화 속에서의 번역은 이렇게 바뀐다.

In the beginning, when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the earth was a formless wasteland, and darkness covered the abyss, while a mighty wind swept over the waters. Then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God saw how good the light was. God then separated the light from the darkness. God called the light ‘day’ and the darkness he called ‘night’. Thus evening came, and morning followed–the first day.

(태초에 신이 천지를 창조했을 때 땅은 형체 없는 황무지였으며, 어둠이 심연을 뒤덮고 있었다. 한편 강풍이 수면을 휘젓고 지나갔다. 그때 신이 ‘빛이 있으라’고 말했다. 그러자 빛이 있었다. 신은 빛을 보고 좋다고 했다. 이어서 신은 빛과 어둠을 나누었다. 신은 빛을 ‘낮’이라 이름하고 어둠을 ‘밤’이라 이름했다. 이리하여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었다. 첫째 날이다.)


또한 구술 문화에서는 형용구의 표현이 붙고 기괴한 형태를 상상하는 경우가 많았다. 단순히 '오디세우스'가 아니라 '용맹하고 지혜로운 영웅 오디세우스'라는 식이다. 단순한 단어 하나를 기억하는 것보다 '지혜로운'과 '오디세우스'를 연관지어 기억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페르세우스가 처치한 메두사는 머리카락이 독사인 괴물이었다. 오디세우스가 죽음의 위협을 받은 키클롭스는 외눈박이 괴물이었으며, 지옥의 입구를 지키는 케로베로스는 머리가 세 개 달린 개였다.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메두사나, 두 개의 눈을 가진 키클롭스, 머리가 하나인 케로베로스보단 기괴한 모습을 가진 괴물들이 구술 문화 속 기억에서는 훨씬 유리했다.




구술 문화에서 언어는 주로 청각적 경험이었다. 소리는 발화되는 즉시 사라지는 특성 탓에, 말은 그 순간의 기억력과 반복에 의존해야 했다. 그러나 문자 문화로 넘어오면서 언어는 시각의 영역으로 넘어왔다. 눈으로 보고 인식하는 글자는, 공간 위에 고정될 수 있는 ‘정보’로 바뀌었고, 이는 사고의 방식에도 변화를 불러왔다. 우리는 글자를 통해 생각을 ‘펼쳐놓고’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종이 위에 배열된 문장은 사고의 흐름을 따라가거나 되짚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즉, 언어를 시각화함으로써 사고는 ‘공간화’되었고, 이는 단순히 기억을 보조하는 수준을 넘어 논리적 연결성을 강화하는 기반이 되었다. 글을 읽고 쓰는 능력은 단편적 감각이 아닌 구조적 사고, 분석적 추론을 가능케 하는 사고 도구가 된 것이다.


4~500페이지가 넘어가는 벽돌책들을 보게 되면, 몇 십 몇 백 만자에 달하는 글자들에 논리적인 연결을 이어간다. 책을 읽는데만 10시간 이상은 걸릴텐데, 과연 10시간 이상 '말하기'로써 책만큼 논리적인 서사를 이어갈 수 있을까 의문이 든다. 어려운 수학 문제를 푼다고 생각해보자. 19528 x 3214를 머릿속에서 암산하기란 힘든 일이지만, 숫자를 종이에 쓰며 논리를 이어가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문제를 풀 수 있는 것처럼 읽기와 쓰기라는 능력은 사고의 흐름을 논리적으로 연결할 수 있는 능력을 증대시켰다.


나는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의 하루와 생각을 기록하고, 감정을 쓰고, 다시 꺼내어 읽어보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인생과 감정은 19528 x 3214 보다 훨씬 복잡한 변수들로 가득한 고차방정식이다. 이 문제를 문법과 형태를 가진 문자의 세계로 가져오지 않으면 절대로 암산할 수 없다. 생각을 정리하고 감정을 돌아보기 위해서는, 그것을 눈에 보이게 꺼내놓아야 한다. 그러니 나는 다이어리를 통해 하루를 기록하고 감사하거나 행복한, 부족하거나 슬펐던 이야기를 기록한다. 책을 포함한 각종 컨텐츠를 통해 생각할 거리를 만들어주는 내용들을 기록한다. 이것이 복잡한 고차방정식을 암산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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