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메모의 시작은 <알쓸신잡>에 김영하 작가님의 어떤 말씀 덕분이었다. 역시 <알쓸신잡> 덕분에 독서를 하고 있었고, 작가란 직업적 타이틀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김영하 작가님은 작가란 '사물의 이름을 아는 자'라고 말했다. 노트를 들고 다니시며 주변에서 접하게 되는 새로운 사물의 이름을 적는 그의 모습이 멋있어 보여 이마트에서 검정색 PD 수첩을 하나 사서 들고다녔다.
그렇게 겉멋으로 들고다니던 오프라인 메모에서 온라인 메모로 확장하게 된 것은 대학생 때 외부 강사로부터 들었던 한 강연이었다. 당시 Workflowy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자신의 독서 기록을 보여주셨다. 폴더 구조(Bullet)로 텍스트를 저장하는 온라인 메모장으로, 책의 기본적인 정보(저자, 출판, 출간일, 목차 등)와 인상깊은 구절을 써놓으셨다. 책을 한 번 읽어도 남는 내용이 없다고 느꼈던 찰나에 이런 방식으로 기록해두면 좋을 것 같아 바로 시작했다.
어느 정도 사용하다 보니, Workflowy는 단점이 있었는데 무료 사용자는 하루에 추가할 수 있는 bullet의 양이 정해져있다는 것이었다. 옮겨야 할 정보가 많은 날에는 하루를 꼬박 기다려 나누어서 저장해야 했다. 그래서 이에 대한 제한이 없으며 Workflowy 기록을 그대로 가져올 수 있었던 Dynalist라는 프로그램으로 전환했다. 이곳에는 인상깊은 책 구절 뿐만 아니라, 여타 컨텐츠로부터 배운 내용들과 개인적으로 진행한 프로젝트와 같은 나의 기록들이 담겼다.
그러나 그동안의 나의 기록은 반쪽짜리였다. 책 <세컨드 브레인>에 따르면 CODE(Capture 수집, Organize 정리, Distill 추출, Express 표현)에 따라 제 2의 두뇌를 생성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동안 나의 기록은 수집과 정리(Capture and Organize)에만 치중되어 있었다.
최근 책 쓰기 프로젝트를 하면서 드디어 나의 기록을 추출하고 표현(Distill and Express)하는데 사용해보았다. 프로젝트를 회고하며 느꼈던 것은 기록들을 다시 들여다보는데 시간이 걸리고 관련있는 기록들끼리의 연관성을 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다시 책 <세컨드 브레인>에 따르면 기록이란 미래의 내가 일을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도록 해주는 '중간패킷'의 역할을 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나는 다시 한 번 기록 플랫폼을 옮기기로 결심했다. 바로 옵시디언이다.
옵시디언은 메모끼리의 연결성을 가시적으로 볼 수 있어 좋았다. MIT 경제학자 세자르 히달고(Cesar Hidalgo)는 <정보의 진화>라는 저서에서 우리의 생각을 구체적인 실체가 있는 디지털 객체로 결정화(crystallize)하면 생각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다고 말했다. 외부의 정보를 단순히 모으고 정리하는 것뿐만 아니라 나의 생각을 결정화(Crystallization)한다는 측면에서 옵시디언(흑요석)이라는 이름도 마음에 들었다. 또한 플러그인 생태계를 가지고 있어 활용도와 자유도의 측면(물론 초창기 장벽도 있지만)도 좋게 평가한 이유가 되었다.
넷플릭스에서 <흑백요리사>가 흥행하며 나의 유튜브 알고리즘에는 파인다이닝 영상이 종종 보인다. 그런 요리사들을 보면 어떻게 모든 손님들에게 동일한 품질로 음식을 준비하는지 궁금했다. 요리사들이 이렇게 타이트한 목표를 달성하는 데는 Mise en Place(미즈 앙 플라스)라는 독특한 철학과 시스템이 존재한다. 1800년대 후반에 태동한 이 개념은 프랑스어로 '제자리에 놓다'라는 뜻으로, 요리를 효율적으로 진행하기 위한 하나의 프로세스이다.
요리사들은 주방 청소를 해야한다거나 설거지를 해야 한다는 이유로 중간에 요리를 중단할 여유가 없다. 즉 음식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작업 공간을 깨끗이 유지하는 습관을 익힌다. 칼을 사용한 뒤 언제나 다시 사용할 수 있도록 바로 깨끗이 닦고, 식자재는 사용 순서대로 정렬해두는 것과 같은 일이다. 이러한 작은 습관들을 몸에 익혀, 요리의 과정이 물 흐르듯이 매끄럽게 유지되도록 한다.
메모의 철학에도 이 프로세스는 유용하다. 메모가 미래의 나와 과거의 나를 연결하는 중간 패킷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작은 습관들이 필요하다. 매일 정보를 수집하고 분류하는 루틴을 수립하거나, 축적된 정보를 재구성하고 연결하는 작업과 같은 일이다.
정보는 우리의 관심을 소비한다. 우리의 관심은 한정된 자원이어서 정보가 넘치도록 풍부하면 우리의 관심은 부족해진다. 정보의 홍수, 정보의 바다에 살고 있는 우리는 우리가 집중해야 할 정보를 필요할 때 찾을 수 있도록 구조화하고, 추상적인 생각들을 구체적으로 결정화시켜야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각자의 메모장을 가지는 것은 미래를 위한 훌륭한 투자라고 생각한다.